"단지 지금 실패한 것이다"
후고 차베스의 석유 정치학
베네수엘라의 후고 차베스가 타계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의 노선을 현실로 이끌어 내려던 그였다.
국제정치의 시각에서 볼 때, 차베스는 석유가 현대 국제정치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를 명확히 인식했던 몇 안 되는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와 비견할 만한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미국의 조지 W. 부시다. 두 사람은 '석유의 정치학'을 잘 이해했지만 노선은 판이했다.
부시는 '석유'를 중심으로 9.11테러 이후의 중동질서는 물론 국제질서를 재편하려 했다. 이런 시도의 첫 신호탄은 이라크 침공이었다. 반면 차베스는 '석유'를 지렛대 삼아 미국의 일방주의를 견제하는 동시에 反신자유주의 전선을 구축해 나갔다.
그는 집권 후 원유정제 시설을 국유화했다. 이 조치는 석유 정치학의 단초가 됐다. 원유정제 시설 국유화는 상징적인 의미가 무척 컸다. 원래 이 시설은 미국의 양대 석유기업인 엑손 모바일과 코노코 필립스 소유였다. 석유자원의 배분은 미국 등 서구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된다. 그는 원유정제 시설 국유화로 서구 열강의 석유 독점체제에 반기를 든 셈이다. 이 조치는 또한 베네수엘라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오리노코 강 유전지대(오리노코 벨트) 개발 사업에 미국 업체의 참여를 원칙적으로 배제하려는 포석이기도 했다. 실제 베네수엘라 정부는 베네수엘라 국영석유사(PDVSA)가 2006년 말까지 오리노코 벨트의 4개 중질유 채굴 사업 통제권을 확보하게끔 조치했다.
미 지질조사국(USGS)의 연구조사에 따르면 오리노코 벨트에 약 5,000억 배럴 이상의 석유가 묻혀있다고 한다. 사우디(2618억 배럴)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물론 이 수치는 잠재적인 것이다. 하지만 석유가 국제정치·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해 볼 때, 오리노코 벨트에 묻힌 방대한 양의 석유는 차베스에게 엄청난 정치적 자산이었음은 분명했다.
이러자 미국은 차베스에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석유기업들이 총대를 멨다. 엑손 모바일과 코노코 필립스는 국유화 조치에 대해 '어느 누구도 득을 볼 수는 없을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이들은 '차베스가 석유를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개발은 등한시 한 채 일련의 포퓰리스트 정책으로 자금을 탕진하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석유기업이 한 국가의 정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제기하고 나선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 언론들은 한 발 더 나아가 석유회사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실어 날랐다.
미국 석유업계와 언론의 주장은 1970년대 칠레의 아옌데 민선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동원했던 논리를 방불케 했다. 흡사 1972년 피노체트의 쿠데타와 유사한 사태가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질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 대목에서 한국 언론들의 인식 부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언론, 특히 보수색채가 강한 유력 언론들은 차베스 집권기간 내내 그를 사회주의자니 포퓰리스트니 하는 식으로 흠집을 냈다. 진보 언론들 역시 베네수엘라 상황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기 일쑤였다. 이 같은 현상은 미국 언론들의 논조를 한국말로 옮기는 데만 급급해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국제 문제를 바라보는 데 있어 우리만의 시각을 개발하는 일이 그리도 어려웠을까?
그는 쿠바의 카스트로를 제외하고 라틴 아메리카의 지도자로선 거의 유일하게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미국으로선 차베스의 존재가 여러모로 불편했을 것이다. 천운이라고 해야 할까? 미국은 중동에 발목이 잡혀 손쓸 여력이 없었다.
이제 차베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단지 지금 실패한 것이다."
그의 공과에 대한 논란과는 별개로 그의 실패는 현 시점에서의 실패로만 기억될 것이다. 이제 그의 성공은 남은 자들의 몫이다.
Rest in Peace Hugo Chávez
1954~2013
'Photo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널드 럼스펠드와 사담 후세인 (0) | 2013.03.16 |
---|---|
에히메마루 참사와 김병관의 앞날 (0) | 2013.03.12 |
잿더미가 된 농성촌 앞에서 (0) | 2013.03.03 |
북-미 화해의 물꼬를 터줄 시원한 덩크슛을 기대한다 (0) | 2013.03.01 |
대한민국에서 부활한 스탈린의 망령 (0) | 2013.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