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아이러니] 도널드 럼스펠드와 사담 후세인
- 이라크 침공 10주년을 맞아
사람 일은 정말 모른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될 수도 있고,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날 수도 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도널드 럼스펠드는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 가장 극명한 사례다.
후세인과 럼스펠드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1983년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후세인과 럼스펠드 공히 야심만만한 정치가였고, 특히 럼스펠드는 포드 행정부 시절 역대 최연소 국방장관을 역임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그리고 1980년대 중동의 상황은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을 성사시켰다.
1979년 이란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 결과 친미노선을 유지하던 팔레비 왕조는 이란에서 축출됐다. 한편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성공할 경우 산유국인 이란마저 넘볼 것으로 우려했다. 혁명에 성공한 아야툴라 호메이니가 반미 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한데다 석유파동의 여파가 여전했기에 이런 우려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였다. 만약 우려대로 소련이 이란과 손을 잡으면 미국은 중동에서의 입지를 완전히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미국으로선 상황을 반전시킬 카드가 필요했다.
사담 후세인은 미국이 중동에서 꺼내든 '신의 한 수'였다. 사담 후세인은 이란의 이슬람 혁명 다음 해인 1980년 이란을 침공했다. 이 전쟁은 이란의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이 1975년 이라크와 맺은 국경협정을 파기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슬람 혁명의 성공은 이미 이라크와의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란은 이슬람 혁명 확산을 원했고 실제 중동 각국의 시아파 이슬람 교도들을 자극했다. 이러자 수니파 회교도인 후세인이 발끈한 것이다.
처음에 미국은 이란·이라크 전쟁에 대해 중립을 지켰다. 후세인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정치적 기반인 바트당이 아랍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강령으로 채택했었고, 이 점이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하지만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적의 적은 친구'라는 냉전시대의 대결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미국은 이슬람 근본주의 혁명을 막아줄 카드로 후세인을 선택했던 것이다.
사실 후세인은 미국의 전략목표에서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였다. 만약 후세인이 이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이란을 다시 찾아올 수 있었고 소련의 중동진출 움직임에도 쐐기를 박을 수 있었다. 후세인이 패해도 미국으로선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미국으로선 힘 안들이고 후세인을 약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후세인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우선 1982년 테러지원국 리스트에서 이라크를 제외시켰다. 사우디와 쿠웨이트는 후세인에게 흘러들어가는 자금의 통로였다. 영국, 프랑스도 후세인 지원에 가세했다. 이라크가 보유한 재래식 무기는 물론 대량 살상무기와 화학무기는 모두 이 시기에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1983년 레이건 대통령은 후세인에게 특사를 파견해 미국은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지 않을 것이며 만에 하나 이라크가 수세에 몰릴 경우 미국은 이라크를 지원할 것을 약속하는 친서를 보냈다. 레이건 대통령이 보낸 특사가 바로 럼스펠드였다.
후세인은 일정 정도 미국의 목표관철에 기여했다. 이란과 이라크는 8년 가까이 지리한 공방을 벌였고, 이로 인해 많은 힘을 소모했다. 미국으로선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한편 후세인은 미국이 지원해준 무기로 시아파와 쿠르드족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모른 척 했다. 그는 이제 미국의 든든한 자산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극적으로 돌변했다. 후세인이 원래 이용목적에서 벗어나 중동패권을 넘봤기 때문이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그 신호탄이었다. 미국은 용도폐기 수순으로 들어갔다. 미국은 언론을 통해 후세인이 저지른 악행들을 하나하나 폭로해 나갔다. 그리고 1991년 다국적군을 조직해 이라크를 쿠웨이트에서 축출했다. 12년 뒤인 2003년 미국은 영국군과 함께 이라크를 침공해 후세인을 축출하고 친미정권을 세웠다. 이라크 전쟁 계획을 입안하고 총괄 진두지휘한 장본인은 1983년 특사로 후세인을 만났던 럼스펠드였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미국과 후세인의 관계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후세인은 1차 걸프전에 이어 또 다시 여론의 심판대에 서야했다. 하지만 후세인만이 모든 비난을 받아야 하는 부정한 여인이었을까? 미국은 돌을 던지는 군중 사이에 숨어 미소 지은 가해자였다. 위선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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