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할 영국의 유화정책 청산
흔히 과거 청산의 성공 모델로 프랑스가 첫 손가락에 꼽힌다. 사실 전후 프랑스의 철저한 나치 잔재척결은 과거 청산의 성공사례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영국 정가(政家)의 사례 역시 프랑스 못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영국은 히틀러의 집권을 내심 반겨했다. 프랑스에 대한 오랜 라이벌 의식도 있었지만 그보다 히틀러의 독일이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확산을 막아줄 방파제 역할을 해주기 바랬던 것이다. 영국은 러시아의 동진남하를 저지하는 걸 국가적 숙명으로 여긴데다, 숙적 러시아가 불경한 볼셰비키의 수중에 떨어졌으니 영국이 독일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독일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정책은 영국의 오랜 외교적 전통인 '세력균형(balance of power)'과도 맞닿아 있었다.
만약 구프로이센 귀족 출신의 보수 엘리트가 이끄는 독일이었다면 영국의 전략적 판단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심만만한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이었다는게 근본적인 문제였다.
히틀러는 제국주의적 팽창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오만불손하게 탈퇴했다. 뒤이어 영토적 요구가 뒤따랐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독일이 주데텐란트라고 멋대로 이름 붙인 체코 영토였다.
* 윈스턴 처칠
영국은 히틀러에게 질질 끌려갔다. 사실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기력이 쇠하기 시작한 영국으로선 독일을 제압할 힘이 부족했다. 이 와중에 잘못된 정책적 판단으로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상황을 스스로 초래하고야 만 것이다. 영국 정가에서 히틀러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제대로 간파하고 그와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 이는 윈스턴 처칠이 거의 유일했다.
영국은 결국 1938년 뮌헨협정을 체결해 독일에 주데텐란트를 할양해주고 만다. '해가 지지않는 제국'이라던 영국의 체면이 땅에 떨어진 굴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당시 수상이었던 네빌 체임벌린은 "내가 해냈습니다. 나는 이로써 우리 시대가 평화로울 것이라고 믿습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고작 체코 영토 일부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전세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이제 영국 정가에서 독일에 대한 유화정책은 설자리를 잃었다. 전쟁 발발 직후 네빌 체임벌린은 사임하고 윈스턴 처칠이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독일과 손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정치인들은 정계에서 축출 당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들'에선 이런 숙청 작업들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살짝 드러난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퇴행을 부른다. 프랑스와 영국이 과거의 과오를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은 성공적인 과거청산 작업이었다. 친일 군인의 딸이 민주적인 방법으로 집권에 성공한 우리나라로서는 정말 부럽기만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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