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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 Review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恨을 일깨우는 바람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감독 켄 로치 (2006 / 독일,스페인,프랑스,영국,아일랜드,이탈리아)
출연 킬리언 머피,패드레익 딜레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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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 그 땅엔 아련한 슬픔이 잔잔히 흐른다. 척박하기만 한 자연환경, 기근, 대영제국의 압제, 그리고 동족간의 분열.... 이런 탓에 아일랜드 민중들의 마음속엔 슬픔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각인돼 있다. 마치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여 모진 고통을 당한 한민족의 가슴 속에 한(恨)이 깊이 깊이 각인돼 있듯이.


그래서인지 그들의 이야기는 늘 언제나 아련한 애수와 슬픔, 그리고 분노와 투쟁으로 점철돼 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뛰어든 두 형제의 이야기를 다룬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에도 아일랜드 민중들의 핏속에 잔잔히 흐르는 투쟁과 슬픔의 정서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의대를 졸업하고 런던에 일자리를 얻게 된 데이미언. 그러나 데이미언은 대영제국의 횡포에 분노,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독립투사로 변신한다. 데이미언이 독립투사의 길을 가게 된 데에는 그의 형 테디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 데이미언은 형을 '행동의 사람(man of action)'이라면서 늘 독립투쟁의 전면에 선 형을 동경해 왔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현실, 그리고 아일랜드의 질곡은 두 형제를 갈라놓는다. 노동자·농민이 주인 되는 완전한 사회주의 공화국의 건설, 지식인의 표상이었던 데이미언이 바라고 그렸던 아일랜드의 이상향이었다. 하지만 형 테디는 아일랜드의 지배층과 타협을 모색한다.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원이 필요하다는 현실적 논거를 내세우며....


독립투쟁을 벌이는 와중에서 드러나는 데이미언과 테디의 미묘한 노선차 - 연출자인 켄 로치는 데이미언과 테디의 미묘한 알력을 무뚝뚝할이 만치 덤덤하게 쫓아간다. 하지만 덤덤하게만 느껴지는 시선엔 연출자의 따스한 연민과 사려가 스며들어 있다.


감독인 켄 로치는 사회주의 색채 짙은 일련의 작품으로 작가정신을 표현한 감독이다. 사회주의자로서 그의 작가정신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1995년作 "랜드 앤 프리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주곡과도 같았던 스페인 내전을 다룬 이 작품에서 켄 로치는 참으로 난마처럼 얽힌 스페인 내전의 본질을 사회주의자의 관점에 입각해 파고들어간다. 특히나 스페인 내전을 둘러싼 국제정치의 난맥상으로 인해 순수한 이상이 좌절되어 버린 무정부주의자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엔 -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떠나 - 강자의 억압 하에 놓인 나약한 인간군상들에게 보내는 연민어린 시선이 선명하게 각인돼 있다.


갈등, 대립, 그리고....


독립투쟁 과정에서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형제간 갈등은 아일랜드 독립 이후 표면화된다. 무려 700여 년 동안 대영제국의 압제에 신음했던 아일랜드, 그러나 아일랜드 민중들은 불굴의 투쟁으로 결국 대영제국의 양보를 이끌어 내기에 이른다. 바로 1922년 체결된 런던조약이 그것이다. 이 조약은 아일랜드의 자치권 허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얼핏 아일랜드 민중들의 숙원을 담고 있는 듯한 런던 조약, 하지만 이 조약은 여전히 아일랜드는 英 연방에 귀속되며 벨파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자치령으로 남는다고 규정한다.


사실 런던조약은 졸렬한 정치적 음모의 부산물이다. 런던조약에는 대영제국이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아일랜드에 대해 외견상 독립을 허용, 아일랜드 문제가 국제문제로 비화돼 대영제국의 체면이 손상되는 사태를 예방하면서도 실질적 지배력은 유지하겠다는 책략이 숨어 있었다.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주창했던 데이미언은 런던조약의 수용을 전면 거부한다. 하지만 형 테디는 비록 불완전한 독립이지만 영국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현실적 방안이라면서 런던조약의 수용을 종용한다. 아일랜드의 미래를 둘러싸고 벌이는 두 형제의 노선갈등, 이 갈등은 급기야 형제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지경으로 비화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아일랜드의 역사에 눈을 돌려야 한다. 데이미언과 테디의 비극 - 이 둘의 비극은 아일랜드 전체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두 거목이었던 마이클 콜린스와 에이먼 드 발레라는 런던조약 수용 여부를 둘러싸고 갈등을 드러냈고 결국 그 둘은 서로 편을 갈라 내전까지 치르고야 말았다. 런던조약 당시 아일랜드 대표로 협상에 나섰던 마이클 콜린스는 협상 결과를 현실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반면 에이먼 드 발레라는 런던조약 결과에 불복, 지지자들과 함께 하원을 탈퇴하는 강수를 뒀다.


독립투쟁 당시 동지였던 독립운동 지도자 마이클 콜린스와 에이먼 드 발레라,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선택했고 급기야 동지에서 적으로 만나기에 이른다.


흥미롭게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마이클 콜린스는 테러·요인암살 등 강경노선을 견지했던 반면 - 미국 시민권자였던 - 에이먼 드 발레라는 對美 외교를 통해 아일랜드 독립을 쟁취해 내려 했다. 마이클 콜린스와 에이먼 드 발레라의 대립과 갈등은 테러와 요인암살 등 강경투쟁 노선을 걸었던 김구 선생님과 미국과의 외교에 사활을 걸었던 이승만의 대립을 떠올리게 한다. 대영제국의 압제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이던 당시부터 알력을 드러냈던 마이클 콜린스와 에이먼 드 발레라의 대결은 그 자체로 극적이었고 또 그 자체로 비극이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닐 조던 감독은 영화 '마이클 콜린스'를 통해 마이클 콜린스와 에이먼 드 발레라의 갈등을 다룬 적이 있었다. 연출자인 닐 조던은 이 영화를 통해 마이클 콜린스를 영웅적 투사로 묘사한 반면 에이먼 드 발레라는 유약하고 정치적 술수로 마이클 콜린스를 궁지에 빠뜨리고 급기야 조국인 아일랜드마저 분열시킨 악한으로 그린다]


대영제국의 압제, 그리고 대영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자마자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아일랜드의 비극 - 그 비극은 일제의 야수적인 수탈에 허덕이다가 간신히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났지만 독립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동족끼리 죽고 죽여야 했던 한민족의 비극과 오버랩된다. 그래서인지 데이미언과 테디의 비극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으로써 드는 연민의 감정을 넘어 묘한 동질감마저 느끼게 된다.


영화 초입, 아일랜드의 한 아낙네는 구슬픈 가락으로 영국군의 가혹행위로 숨진 어린 소년의 넋을 위로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 잔잔하면서 애수어린 그 가락, 그 가락에서 아일랜드 민중의 가슴 속 깊이 각인된 슬픔을 엿본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그 바람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여 모진 고통을 당한 한민족의 가슴 속에 깊이 각인된 한(恨)마저 꿈틀거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