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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누구나 쉽게 찍을 수 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사진에 대해서 쉽게 정의내릴 수 없고 또 동시에 사진의 예술적 가치에 대해서 쉽게 논할 수 없다. 과연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진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 예술의 정의는 무엇인가? 사진은 예술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가?
사뭇 심오한 통찰을 요하는 주제, 이 주제를 논하려면 논문 분량의 방대한 담론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립 퍼키스는 쉽지 만은 않은 주제들을 쉽고 명쾌하게 풀어 나간다. 그의 저서 <사진강의 노트>는 지난 40여년 간 거리와 워릭의 풍경을 찍으며, 그리고 학생들에게 사진을 가르치며 습득한 통찰이 스며 있는, 의미 있는 저작이다.
사실 이 책 <사진강의 노트>를 읽어 내려가기는 쉽지 않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선 이 책에서 주로 언급되는 사진가들, 이를 테면 헬렌 레빗이라든지 저자의 스승이자 풍경사진의 대가 앤젤 애덤스, 다이앤 아버스, 워커 에반스, 앙드레 케르테즈, 으젠느 앗제, 그리고 아구스트 잔더 등 사진사에 큰 획을 그은 사진가들에 대해 사전 지식을 쌓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다. 저자는 다른 예술장르의 장인들도 끌어들인다. '네오 클래식 발레'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개념의 장르를 개척한 발란신에서 재즈 연주자 줄리어스 햄플, 엉뚱한 선문답으로 유명한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 명포수 요기 베라,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를 비롯한 문학가들까지.... 그러나 이 모든 논의가 저자의 현학에서 비롯된 허세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필립은 이 모든 논의를 통해 독자들을 보다 심오한 통찰의 세계로 안내한다. 필립이 펼치는 사진 이야기는 마치 조그만 파인더 속에서 펼쳐지는 세상의 다채로움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 하다.
보여지는 것, 그 자체, 너무 성급하게 메타포나 상징으로 건너뛰지 마라. '문화적 의미'를 담으려 하지 마라. 아직 이르다. 이런 것들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먼저 대상의 표면에 떨어진 빛의 실체를 느껴야 한다.... 이름을 주지도, 상표를 붙이지도, 재 보지도, 좋아하지도, 증오하지도, 기억하지도, 탐하지도 마라. 그저 바라만 보아라. 이것이 가장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저 보이는 게 찍힐 뿐이다. 카메라는 파인더 안에 보이는 사물의 표면에 반사된 빛을 기록할 뿐이다.
그것의 의미를 경험한다는 것, 몇 초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을 그저 바라만 보며 그 존재를 느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가 배제된 목소리, 음악의 선율, 도자기, 추상화, 그것의 현존, 그것의 무게, 그것의 존재와 나의 존재의 경이로움. 사실 그 자체의 신비
무엇보다 이 책은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다. 물론 본문 가운데 사진인화에 관한 기술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사진의 최초 과정인 촬영단계에서 있을지도 모를 기술적 실수에 대비하기 위한 대비책으로 언급될 뿐이다. 그러나 필립은 기술을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그보다 필립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사진으로 경험하는 것의 관계, 사진의 주제가 되는 것 끼리의 주체적 협동을 더 강조한다. 사실 사진, 그리고 사진을 아우르는 예술에서 기술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과제에 지나지 않는다.
기술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보고 느끼는 사진 속에서 사진의 내용이 되는 질감과 명도를 제대로 살릴 수 있도록 사진가의 섬세함을 기르는 일이다. 음악의 음색, 목소리의 어조, 감정의 느낌, 시의 가락, 떨림의 장단, 동작의 선
겉으로 보기엔 아담하기만 한 책, 그러나 페이지 한 장 한 장에 적힌 글귀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심오한 그 무엇인가가 깃들여 있음을, 마음 속 깊숙히 내재한 그 무엇인가를 깨우는 힘이 스며 있다.
사진은 절대적인 크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상대적인 크기를 보여줄 뿐이고 미루어 짐작될 뿐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세상의 어떤 것도 자체의 크기 따윈 없으며 오직 다른 것과 비교해서 어림된다는 사실이다. 자, 주행기록계, 거리 측정기, (손을 포함하여) 그밖의 다른 측량장치들은 모두 상대적인 크기를 표준치에 맞춰 재도록 합의된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장치들이 그저 소통에 유용할 뿐이지 절대적인 크기를 보여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조차 못한다.
나는 어떤 장소에 서 있다. -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잘 기억 나지 않는다. - 내 앞에 놓인 무언가를 바라본다. - 그것에서 어떤 주제가 튀어나올지 알 이유도, 방법도 없다. - 나와 그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빛. 그 빛을 기록하는 작은 카메라를 집어든다. 결과는 내 한계를 초월하는 세계를 보일 수도, 고양된 내 감정을 드러낼 수도 있다. 이 모든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나는 모른다. 앞으로도 절대 알지 못하기를 희망한다.
너무나도 쉬운 언어, 하지만 깊이 있는 통찰 - 저자의 식견에 놀라고 사진이라는 매체가 이토록 사고의 깊이를 더해줄 수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고 만다. 저자의 통찰을 한정된 지면에 송두리째 옮길 수 없어 아쉬울 뿐....
개인적인 느낌을 덧붙이자면, 이 책을 접하게 되면서 사진에 보다 진지한 태도를 갖고 접근하게 됐다.
겨울 하늘을 가르는, 헐벗은 나뭇가지를 스치며 날아가는 새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이 순간, 나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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