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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독일어 시간] 정신병동에서 재조명한 독일의 광기


독일어시간1(세계문학전집40)
카테고리 소설 > 소설문고/시리즈
지은이 지그프리트 렌츠 (민음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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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시간2(세계문학전집41)
카테고리 소설 > 소설문고/시리즈
지은이 지그프리트 렌츠 (민음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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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시간] 정신병동에서 재조명한 독일의 광기


독일은 자타가 공인하는 유럽의 경제-문화대국이다. 그러나 독일은 문화대국이란 수식어가 무색하게 양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전세계를 전쟁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특히 1차 세계대전 패전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1930년대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독일에서는 파시즘의 광풍이 불어닥쳤고 그 파시즘은 전세계를 파국으로 몰아 넣었다. 

 
괴테, 실러, 칸트, 헤겔, 베토벤 등 위대한 문인-음악가-철학자를 배출하며 인류문화에 큰 기여를 한 독일에서 본질적으로 反이성적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하는 파시즘이 창궐했다는 사실, 그리고 파시즘이 수천만의 무고한 인명을 앗아갔다는 사실은 파시즘의 진원지인 독일은 물론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전후 독일 문단은 파시즘의 창궐에 따른 인간성 파괴를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 결실이 바로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그리고 이제 소개할 지크프리트 렌츠의 <독일어 시간>이다. 귄터 그라스의 경우 그의 작품 <양철북>은 영화로도 만들어진데다 노벨 문학상 수상 등으로 인해 대중에 잘 알려져 있다. 반면 지크프리트 렌츠의 작품은 잘 소개가 되지 않은 편이다.

 
<독일어 시간>은 주인공 지기 예프젠이 정신병동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 역시 주인공 오스카르 마체라트가 정신병동에서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으로 운을 뗀다. 이 대목은 무척이나 중요한 함의를 던져준다. 지기 예프젠과 오스카르 마체라트의 정신착란은 파시즘으로 황폐화된 독일인들의 내면에 대한 은유다. 즉, 유럽의 강국을 자처하는 독일이 "파시즘"이라는 집단적 광기에 홀려 무모한 세계 정복전쟁을 일으켜 유럽은 물론 "독일-독일인"이란 자아정체성마저 파괴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꼬집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북독일의 자연, <독일어 시간>에서 묘사된 서정적인 북독일의 풍광은 이 작품이 낭만주의를 꽃피웠던 독일의 문학적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파시즘은 서정적이기 그지 없는 조그만 마을에도 마수를 뻗는다. 이러자 주인공 지기 예프젠의 내면은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 대목에서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기폭제가 됐던 폭풍노도(Strum und Drang)의 영향이 감지된다. 

본질적인 인간성마저 파괴하려는 파시즘, 이 와중에서 내면을 지키려 지기 예프젠이 벌이는 고독한 투쟁.... 지기 예프젠은 노도와도 같은 갈등의 와중에서 끝내 내면을 지키지 못하고 정신병동에 수감돼 미국인 심리학자의 연구대상으로 전락해 버린다. 마치 전후 독일이 전세계 지성들에게 집단 심리연구의 흥미로운 주제로 전락했듯이 말이다.

 
나치 독일 최초의 유대인 강제 수용소였던 뮌헨의 다하우 수용소엔 나치의 착취에 시달리다가 독가스를 마시고 한 줌의 재로 화해버린 수천-수만의 유대인의 넋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그 비문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Den Toten zur Ehr,
Den Lebenden zur Mahnung.

 
사자(死者)에겐 경의를,
산 자들에겐 경고를....

 
전후 독일에서는 정계-학계를 막론하고 지난 날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있었다. 문단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련의 작품을 통해 파시즘의 광풍에 휘말린 과거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과 함께 전후 소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지크프리트 렌츠의 <독일어 시간>은 전후 독일이 기울였던 과오시정 노력의 중심에 서 있는 의미 있는 결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