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안기다] 당신에게 복음은 무엇입니까
환경운동가가 쓴 '복음 입문서'
서점에 진열된 책 가운데 제목만 봐도 설레임을 불러일으키는 책이 있기 마련이다. 최병성 목사의 책 '복음에 안기다'가 바로 이런 책이다. 책 표지부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설레임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최병성 목사는 목회자이기 보다 환경운동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특히나 이명박 정권이 벌인 4대강 사업이 가져온 폐해를 생생히 증언한다. 망국적 토건사업으로 인해 파헤쳐지고 찢겨진 우리 산하를 바라보는 저자의 어조엔 애통함이 절절히 베어져 있다. 동시에 이런 사업을 벌인 정권을 향해 거침없이 사자후를 토해낸다.
하지만 이 책 '복음에 안기다'에서는 전혀 운동가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본문을 읽고 있노라면 온유하고 자상한 성품의 할아버지가 옛날 옛적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동안 환경운동가로만 알았던 인상이 선입견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 '복음에 안기다'는 복음에 대한 안내서다. 사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했어도 복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이들은 많이 없을 것이다. 주일만 되면 아침엔 주일학교 교사로, 대예배 때엔 성가대 대원으로, 오후엔 청년회 섬기미로 분주하게 뛰어 다니다가 기진맥진하기 일쑤인게 일반 평신도의 신앙생활이다. 목회자들은 예수 잘 믿고 봉사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하면 복 받을 것이라고 귀에 닳도록 설교할 뿐 정작 복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복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설교한 적은 많이 없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목회자들 역시 복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저자인 최병성 목사는 이 책 '복음에 안기다'를 통해 복음을 아주 쉽게 설명해준다. 복음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다. 왜 기쁨을 주는 소식일까?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이루셨으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말하며 우리를 은혜의 바다로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듣기만 해도 가슴 벅차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했고,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존재다. 그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이루셨단다. 이토록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나를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가슴이 벅차올라올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아니한가?
복음은 이렇게 쉽게 이해된다. 하지만 왜 이토록 쉽게 이해되는 복음을 목회자들은 신도들에게 설파하지 않을까? 바로 이 대목이 이 책 '복음에 안기다'를 빛내주는 대목일 것이다. 저자의 진단은 명쾌하다. 교회 안에 사탄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힘주어 말한다.
열심과 헌신이 참 신앙을 재는 척도가 아닐진데, 이 땅의 수많은 목회자들과 신도들은 열심과 헌신의 정도로 신앙의 좋고 나쁨을 잰다. 아니, 열심과 헌신도 필요 없다. 헌금에 붙은 0 단위가 많으면 많을수록 믿음의 깊이가 결정된다. 어떤 목회자는 드러내놓고 설교 시간에 '이발사나 의사 만나면 최소한 만원은 내는 사람들이 하나님 만나러 오면서 만원 헌금도 안 가져올 수 있느냐'고 신도들을 책망하기까지 했다.
교회 안까지 파고든 사탄
열심과 헌신 그 자체가 죄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열심과 헌신이 전제되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그 믿음은 잘못이며 죄악이며, 신성모독이다. 문제는 이 땅의 교회에 이런 신성모독이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저자는 이런 모든 것들을 사탄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탄을 몰아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제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탄을 몰아내야 합니다. 사탄은 예수를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사탄은 예수가 우리에게 선물한 기쁨의 소식 복음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우리 영혼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기쁨을 빼앗아갑니다.
이 대목에서 환경운동가로서 보여준 예언자적 외침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사실 목회자가 환경운동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좋았더라 하셨는데, 이토록 좋은 세상을 포크레인으로 파헤치고 생명을 앗아간 망국적 토목사업을 준엄히 꾸짖는 것도 당연 목회자가 감당해야 할 사역일 것이다.
목회자들의 설교 가운데 빈번하게 인용되는 예화 중의 하나가 마르다와 마리아의 예화일 것이다. 마리아는 앞 뒤 안보고 예수께 가서 그의 말씀을 듣고 그와 함께 자유함을 누렸다. 하지만 마르다는 예수를 모시느라 필요한 이런저런 일들이 먼저라는 생각에 이런 일들에 몰두한다. 그런 나머지 마리아를 그저 노닥거리는 줄만 알고 핀잔을 준다.
아마 많은 목회자들이 마리아와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설교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설교시간에서일 뿐, 실제 교회의 운영이나 부흥을 위해선 신도들이 마르다 같이 행동하기를 은근 바랄 것이다.
이제 이런 최면에서 신도들 스스로 벗어나야 할 일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수난을 당하셨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사하셨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자유다. 헌신과 봉사? 그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일일뿐, 예수를 믿는 제자로서 우리가 가장 먼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큰 기쁨을 주는 좋은 소식을 듣고 그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일이다. '복음에 안기다'는 제목도 이런 은유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헌신과 봉사의 테두리 안에 가두지 말자, 그리고 복음에 안기자. 그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자. 당당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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