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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벌레이야기] 신군부의 만행이 일깨워준 용서의 참의미

밀양벌레이야기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이청준 (열림원,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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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이야기] 신군부의 만행이 일깨워준 용서의 참의미


영화 <밀양>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된 이청준의 원작 소설 <벌레 이야기>는 1980년 광주 민중항쟁과 신군부의 집권이 모티브다. 원작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날 이 나라의 아픈 과거, 그리고 교회의 어두운 역사를 돌아보아야 한다.


1980년 전두환을 수장으로 한 신군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서거로 인해 생긴 리더십 공백을 틈타 권력을 집어 삼켰다. 그리고 그들은 민주주의를 갈망하며 신군부의 폭거에 항거한 이 나라 민중들의 열망을 무참히 짓밟았다. 1980년 광주의 비극은 그렇게 생겨났다.


그런데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측은 실로 놀라운 일을 저질렀다. 국가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고 새로이 권좌에 오른 대통령을 위해 은혜를 구했다. 다름아닌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개신교는 사실상 손에 피를 묻히고 권력을 장악한 권력자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손에 가장을, 형제를, 친구를 잃었던 이들의 아픔은 외면한 채....

작가 이청준은 바로 이런 어두운 역사에서 모티브를 얻는다. 그는 <벌레 이야기>에서 부도덕한 권력과 손잡은 교회를 통해 기독교의 핵심 교리 가운데 하나인 '용서'의 의미를 일깨운다.


주산학원 원장 김도섭은 원생이던 알암이를 살해해 암매장한다. 아들을 잃은 엄마는 타오르는 복수심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알암이 엄마는 이웃인 김집사의 신실하면서도 집요한 설득을 받아 들여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곤 용기를 내어 살인자 김도섭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는다. 그런데.... 김도섭을 만난 알암이 엄마는 깊은 절망감에 몸서리친다. 


교도소에 수감 중인 김도섭의 모습은 성인에 가깝다. 김도섭은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죄과를 참회'했고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단다. 그는 알암이 엄마의 면전에서 '마음의 위로가 될 수만 있다면 자기가 저지른 죄과에 대해 어떤 책벌도 기꺼이 감수하겠노라'고까지 고백한다. 
 

알암이 엄마는 김도섭과의 만남 이후 그간의 신앙생활을 무색케 하듯 절망의 나락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런데 김집사는 알암이 엄마의 태도에 의아해 한다. 그런 김집사에게 알암이 엄마는 소리친다.

 
"저도 집사님처럼 그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어요. 그래 교도소까지 그를 찾아갔구요. 그러나 막상 그를 만나 보니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건 제 믿음이 약해서만은 아니었어요. 그 사람이 너무 뻔뻔스럽게 느껴져서였어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 사람은 내 자식을 죽인 살인자에요.


살인자가 그 아이의 어미 앞에서 어떻게 그토록 침착하고 평화스런 얼굴을 할 수가 있느냔 말이에요. 살인자가 어떻게 성인 같은 모습으로 변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에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에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전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에요."
 

알암이 엄마의 절규어린 외침, 하지만 김집사는 단호하다. 김 집사는 절대자의 사도라도 되는 양 신의 섭리를 앞세워 알암이 엄마를 책망한다.
 

"알암이 엄마, 그 사람은 애 엄마 앞에서 뻔뻔스러워 그런 얼굴을 한 게 아니에요. 알암이 엄마도 들었지 않아요. 그 사람은 이미 영혼 속에 주님을 영접하고 있었던 거에요. 그것으로 주님의 사람을 얻고 있었던 거에요. 그래 그토록 마음과 얼굴이 평화스러웠던 거에요."
 

알암이 엄마는 이런 김집사 앞에 거세게 항변한다. 알암이 엄마의 항변은 거의 절규에 가깝다.
 

"집사님 말씀대로 그 사람은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아직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용서될 수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동시에 가장 잘못 이해되고 있는 덕목이 바로 '용서'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제 아무리 후안무치한 죄악을 범한 자라도 자신 앞에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면 그 죄를 더 이상 묻지 아니한다. 그러나 용서 이전에 전제되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애통함이다. 애통함이 전제되지 않은 용서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믿음일 뿐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악으로 인해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을 삼키고 울부짖고 있는데, 자신으로 비롯된 고통은 안중에도 없이 절대자의 사랑에 힘입어 죄사함을 입었다는 고백은 용서의 취지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처사다.   


자신의 범죄행각으로 인해 아들을 잃은 엄마가 찾아 왔는데, 그 앞에서 어떤 애통함의 표현도 없이 태연작약하게 용서 운운 하는 김도섭은 신성모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알암이 엄마에게 믿음 없음을 책망하는 김집사의 행태는 비인간적이다. 하느님의 섭리가 쉽게 납득되고 표현될 수 있는 따위라면 기독교 신앙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따르면 인간은 신성을 지닌 존재다. 절대자께서는 흙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 넣어 인간을 창조하고 자신의 자녀로 삼으셨다. 그렇기에 인간 존재 하나 하나는 너무나도 소중하기만 하다. 그러나 신의 섭리라는 기고만장한 슬로건을 내세우며 인간성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 믿음일 수는 없다.  


기억하라.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신앙은 인성 모독임과 동시에 신성 모독임을....
 

"사람은 자기 존엄성이 지켜질 때 한 우주의 주인일 수 있고 우주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 절대자 앞에 무엇을 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가."
 

- 저자 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