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사마 빈 라덴(1957~2011)
오사마 빈 라덴, 그리고 파키스탄 커넥션
빅 뉴스 뒤엔 늘 후폭풍이 따른다. 2011년 5월 외신을 뜨겁게 달궜던 오사마 빈 라덴의 사망소식도 그렇다. 9.11 테러의 배후인물이며, 알 카에다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군의 공격을 받아 사살됐다. 이러자 그의 사망을 놓고 이런저런 뒷말들이 무성하다.
무엇보다 빈 라덴의 죽음을 계기로 미국과 파키스탄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소식이 눈에 띤다. 미국은 '파키스탄 군부가 빈 라덴을 비호한 것 아니냐'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고, 이에 파키스탄은 '우리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간의 산악지대 동굴에서가 아닌,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 인근의 저택에서 사망했다는 건 파키스탄 쪽에서 누군가가 음으로 양으로 빈 라덴을 비호했다는 설에 무게를 실어 주고 있다.
사실 오사마 빈 라덴과 파키스탄이 모종의 유착관계를 맺고 있음은 여러 경로로 솔솔 흘러 나온적이 있었다. 특히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를 다룬 고든 토마스의 책 <기드온의 스파이>가 빈 라덴-파키스탄 커넥션을 아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9.11 테러 직후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은 미국의 아프간 침공에 적극 협조했다. 파키스탄의 행태를 이해하기 위해선 약간의 배경설명이 필요하다.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군부 쿠데타로 집권했다.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모든 제3세계의 지도자들이 늘 직면하는 문제가 바로 취약한 정통성을 어떻게 메우느냐 하는 문제다.
그런데 제3세계 군부 지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미국에서 찾았다. 즉 미국에 기대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려 했다는 말이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역시 과거 자신의 선배(?)들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간다.
무샤라프는 무척 운이 좋았다. 아프간 침공을 준비하던 미국은 인접국인 파키스탄의 협조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페르베즈 무샤라프가 친미노선을 표방하자 반색했고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이 2001년 부터 매년 파키스탄에 제공한 원조액은 20억달러(2조1000억원)에 달한다. 무샤라프의 도박은 일단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정치적 반대파, 특히 군부와 정보부의 반대파들은 무샤라프의 친미노선을 못마땅히 여겼다. 무엇보다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였기에 무샤라프의 친미 노선은 이슬람 정서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기드온의 스파이>의 저자 고든 토마스는 파키스탄 군부와 정보부가 무샤라프의 친미 노선에 반발한 나머지 빈 라덴에게 미국의 수색작전 첩보를 흘렸다고 적는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무려 10년 가까이 빈 라덴이 미국의 포위망을 용케 피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파키스탄 군부와 정보부의 정보유출에 힘입었다는 말이다.
파키스탄 군부와 정보부가 정말로 빈 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주고 미군의 작전정보를 흘려 주었는지의 여부는 오랜 세월이 지나야 비로소 확인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빈 라덴의 은신처가 군부대 인근이었다는 점, 그리고 미국이 단독으로 빈 라덴 제거작전을 감행했고, 이는 혹시 정보가 새나갈까 우려했던 미 정보당국의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대목은 무척 시사적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빈 라덴은 세상을 떠났다. 오바마는 빈 라덴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정의는 실현됐다(Jusctice has been done)"라고 자랑스럽게 선포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빈 라덴은 이미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에 대항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고, 제2, 제3의 빈 라덴이 도처에서 활개를 치며 미국의 군사 패권주의에 도전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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