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부장을 저는 개인적 은인 뿐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의 은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분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박정희 유신독재를 끝낼 수 있었겠습니까. 김재규 부장은 박정희 3선 개헌 때부터 그를 반대했을 뿐 아니라 이 나라 우리 국민을 위해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군인적 확신을 갖고 살아온 분이에요. 그리고 1972년 10월, 그는 유신정변을 지켜보며 마음이 착잡했고 중앙정보부 차장 시절에 고민했고 그 후 건설부 장관이 되어 장관 임명장을 받을 때도 그날 거사를 계획했던 그의 말 속에는 늘 민주주의를 꿈꾸는 의인다움이 있었어요."
- 함세웅 신부
움베르토 에코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의 한 대목이다. 호르헤 수도사는 금단의 지식을 지키기 위해 이에 접근하려던 수도사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 나간다. 그의 수법은 간단했다. 주변에 있는 기물을 손아 잡히는 대로 집어 들어 살인행각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그의 행각은 희한하게도 요한계시록에 적힌 세상종말의 징후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러자 호르헤 수도사는 자신의 행동이 신의 계시에 따른 일로 착각했다.
새삼 김재규가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은퇴한 함세웅 신부가 그를 극진히 칭찬해서다. 사실 이 나라는 그에게 일정 정도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총탄이 아니었으면 유신의 종식은 나중으로 미뤄졌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의인다움에 대해선 동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호르헤 수도사처럼 우발적으로 총질(?)을 했는데 이런 행동이 주변 및 시대상황과 맞물리면서 의인의 자리를 획득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가 시해되기 직전 차지철과 김재규는 사사건건 알력을 드러냈다. 사회적으로는 부마항쟁과 YH사건으로 혼란이 빚어졌다. 이 두 사건은 박정희의 권력이 약화되어 간다는 결정적인 징후였다. 차지철은 중앙정보부가 정치적 반대파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게 군다고 몰아세웠다. 이러자 갈수록 정권기반이 흔들리던 박정희는 차지철의 강경론에 맞장구를 쳤다. 실제로 운명의 그날, 박정희는 김재규를 심하게 질타했다고 전해진다. 김재규 입장에서는 까마득한 후배에다 고작 대위로 예편한 차지철이 대통령을 등에 업고 어깨에 힘깨나 주고 다니는 꼴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박정희는 집권 말기로 갈수록 수많은 '예스맨'들에게 둘러싸여 이성적 판단력을 잃고 점점 경직된 방향으로 나아갔다. 김재규는 이런 상황을 우려의 눈빛으로 봐왔다. 이에 그는 한 번 혁명을 일으켜보자는 충동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미국도 자신을 도와줄 것 같았다. 지미 카터 행정부는 박정희와 늘 긴장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산은 잘못된 것이었다. 당시 주한 미 대사였던 윌리엄 글라이스틴은 이렇게 적는다.
"김재규는 우리(미국)가 그를 '하얀 모자를 쓴 사람'(좋은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느 정도에서는 그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시각은 그가 '검은 머리 위에 하얀 모자'를 쓴 중앙정보부장이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의 착각이 그런 무모한 일을 저지르는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혁명은 우발적인 충동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만약 그가 민주주의를 꿈꿨다면 박정희 시해 이후 정권을 접수하려는 구체적인 기획이 존재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청사진도 갖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정승화 참모총장과 함께 육군본부로 향하는 우를 범했다. 그는 권력의 공백기을 틈타 유리한 위치를 점해야 했고 그렇게 하려면 근거지인 중앙정보부로 갔어야 했는데 말이다.
김재규의 거사는 분명 역사의 재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미화는 금물이다. 우발적으로 벌인 일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일 자체가 우습기 때문이다. 그의 공은 유신의 심장을 쏜 것에 한정되어도 좋다고 본다. 사실 그 일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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