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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 Review

타인의 삶] 감시체제가 연출하는 살풍경



타인의 삶 (2007)

The Lives of Others 
9.4
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출연
울리히 뮈헤, 세바스티안 코치, 마르티나 게덱, 울리히 터커, 토마스 디엠
정보
드라마, 스릴러 | 독일 | 137 분 | 2007-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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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체제가 연출하는 살풍경 

국가 공권력의 감시는 인간성 파멸로 귀결돼 


현대 국가의 기능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외교, 국방? 아니면 복지? 어딘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정답은? 구성원에 대한 감시와 통제다. 과거 냉전 시절,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는 감시와 통제가 노골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이 같은 행태가 비단 옛 공산권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민주주의를 내세운 국가들에서 조차 감시와 통제는 일상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국가의 감시기능은 권력 자체의 속성에서 비롯됐다. 권력은 늘 무한팽창을 추구한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국가가 담당해야 할 업무가 폭주하면서 국가권력은 자연스럽게 비대해졌다. 권력의 팽창본능은 이 같은 현상을 부추겼다. 


국가 권력이 거대한 조직망을 동원해 구성원들을 감시, 통제하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2006년作 '타인의 삶(원제 : Das Leben des Anderen)'은 이런 살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영화의 배경은 1984년 독일민주공화국(舊 동독)의 수도 동베를린이다. 영화의 시점을 1984년으로 설정한 건 무척 의미심장하다. 극단적 전체주의를 다룬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소설에서처럼 영화 역시 전체주의 국가체제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슈타지 요원 비즐리는 탁월한 심문기술의 소유자다. 그의 심문에 걸려들면 없는 혐의마저 사실로 둔갑한다. 국가관도 투철하다. 자신의 일이 곧 국가를 위한 일이라는 자부심에 넘친다. 상부는 그를 높이 평가한다. 





비즐리는 상부로부터 게오르그 드라이만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하달 받는다. 드라이만은 동독 최고의 극작가로 당시 서기장이던 에리히 호네커와도 친분이 있었다. 그는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했고, 서방언론의 기사를 탐독하며 공산체제에 비판적인 입장을 종종 드러내기도 했다. 그가 슈타지의 감시대상에 오른 이유는 다름 아닌 이 같은 성향 때문이었다.


드라이만에 대한 감시망은 가공할 만하다. 슈타지는 집안 구석구석에 감시 카메라와 도청장치를 설치했다. 이 때문에 그의 출입상황과 지인들과 나누는 전화는 물론 심지어 그가 연인인 크리스타와 나누는 은밀한 이야기까지 슈타지 요원의 귀에 생생히 전달된다. 


이 대목에서 잠시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 슈타지라는 기관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영화의 메시지에 쉽게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슈타지의 공식 명칭은 국가안전보위성(Ministerium für Sicherheit)으로 1950년 창설됐다. 


舊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 체제 유지 일등공신


창설 이후 슈타지는 독일 공산주의 정권을 받치는 기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요원들은 사회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정보를 캐냈다. 이들은 첨단 기술과 억압적인 심문 기법을 이용해 주민들의 삶에 개입하고 사고를 통제했다. 


슈타지의 악랄함은 첩보기술에서 더 생생히 드러난다. 이 기관은 특히 인적 요소를 잘 활용했다.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의 연구에 따르면 1989년 현재 9만 1,015명의 공식 요원과 17만 3,200명의 비공개 요원들이 슈타지에 몸담고 있었다. 


동 기관은 또 슈타지 요원 1명 당 감시 인원을 약 180명으로 추산했다. 옛 소련 정보부(559명), 폴란드(1,574명), 구 서독 정보부(4,100명)와 비교해 볼 때 밀착감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수준이다. 


친서방 성향의 극작가 드라이만도 슈타지의 밀착 감시를 받는다. 비즐리는 그의 모든 행동거지를 실시간으로 기록해 상부에 보고한다. 하지만 국가권력이 인간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본연의 감정마저 통제할 수는 없었다. 비즐리는 드라이만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차츰 그에게 매료돼 간다. 작가의 맑고 투명한 영혼과 예술혼이 냉혹한 슈타지 요원의 내면에 인간미를 불어 넣어준 것이다. 


영화는 비즐리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감정 변화를 차분히 그려낸다. 그의 심경변화는 독일 낭만주의 사조의 기폭제가 됐던 질풍노도(Strum und Drang)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한 개인의 힘은 거대한 감시체제와 맞서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드라이만은 서독의 유력 주간지인 슈피겔지에 동독의 자살현황에 대한 기사를 기고했다. 동유럽 공산권 가운데 동독이 헝가리 다음으로 자살률이 높다는 것이 기사의 핵심 내용이었다. 그는 이때 익명을 사용했다. 당국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한 편법이었다. 


당국은 문제의 기사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냈다. 체제의 치부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당국은 드라이만을 용의자로 지목한다. 비즐리는 드라이만의 방패막이를 자처하고 나선다. 사찰보고서를 거짓으로 작성해 당국의 의심을 피하게 해줬다. 드라이만은 위기를 넘기는 듯 했다. 


슈타지는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요원들은 집요하게 마수를 뻗쳤다. 그의 연인인 크리스타를 붙잡아 무자비하게 심문을 가한 것이다. 그녀는 강도 높은 심문을 이기지 못하고 비밀을 실토한다. 입을 열기 무섭게 슈타지 요원들은 드라이만의 집으로 들이닥친다. 그녀는 이런 광경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죽음을 택한다. 


영화는 이 대목에서 메시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즉, 국가의 무차별적인 감시와 통제는 구성원의 파멸로 귀결된다는 전언이다. 


'타인의 삶'에서 그려진 감시망은 무한팽창을 추구하는 권력의 속성과 현대의 첨단기술이 만나 탄생한 가공할 실체다. 이 괴물은 여전히 세상을 떠돌며 권력자들을 유혹한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조차 이 괴물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나라의 경우가 그렇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정부가 보여준 행적은 슈타지와 너무나 유사하다. 정부는 우선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이하 지원관실)이라는, 법적 지위가 모호한 기구를 설치했다. 슈타지 역시 창설 초기부터 종말을 고할 때까지 수행 과제, 권한, 관할 범위 등이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지원관실이 벌인 일은 더더욱 놀랍기 그지없다. 기업인, 정치인, 연예인 등 각계각층에 걸쳐 대상자를 선별하고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기록했다. 대상자들은 대부분 예외 없이 정부에 비판적인 자세를 보였던 사람들이었다. 사실상 정부가 정부에 찬성하는 국민과 반대하는 국민으로 분류해 후자에 속한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한 것이다. 슈타지의 망령이 이 정부에 투영된 듯한 착각마저 들 지경이다.


영화 '타인의 삶'은 해피앤딩으로 끝을 맺는다. 비즐리는 당국의 눈 밖에 나 한직으로 밀려난다. 그는 묵묵하게 자신의 일에 충실하다가 베를린 장벽 붕괴를 맞이했다. 드라이만은 뒤늦게 그의 고마움을 알고 그에게 책 한 권을 헌정한다. 


현실은 보다 적나라하다. 민간인 사찰에 개입했던 공직자들은 증거인멸을 시도했고, 이 같은 정황이 드러나자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다. 거짓을 거짓으로 덮는 모습에서 비루함마저 엿보인다. 


국가공권력의 무분별한 감시와 통제는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의 영혼도 똑같이 파괴한다는 걸 가르쳐 주는 듯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