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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이 되어

성도의 윤리를 생각할 때

성도의 윤리를 생각할 때


아무래도 성도의 윤리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성도의 윤리를 논하기에 앞서 생산과 소비의 고리를 살펴보자.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생산과 소비는 닭과 달걀의 관계일 것이다. 닭이 없으면 달걀이 있을 수 없고, 역으로 달걀이 없으면 닭이 있을 수 없듯 생산과 소비는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다. 


전병욱은 목회를 비즈니스화 시켜 성공을 거뒀다. 그는 무엇보다 현시대 청년들이 듣기 원하는 메시지를 성경적 근거를 찾아 전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청년들이 그의 설교에 열광했던 건 따지고 보면 그가 이 시대 청년들이 바라고 원하는 그 '무엇'을 충족시켜줬기 때문이다.


한 예로 그의 설교는 성공주의-엘리트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시대 젊은이들은 세상에서 부와 명예를 거머쥐기를 소망한다. 이 같은 욕구는 크리스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왠지 세속적 성공이 신앙과는 부합하지 않은 것 같아 불편하기만 하다. 그런데 전병욱은 이런 불편함을 말끔히 해소시켜줬다. 그는 세상에 나가서 성공하라고 강권한 한편 권위와 친해지라고 설파했다. 성공의 기회는 앞선 세대에게 나온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의 성공주의 신학은 세속적 성공 보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부도덕한 권위에 온 몸으로 맞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그의 성공주의 설교에 열광했다. 그는 세속적 성공이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줬기 때문이다.


그는 가끔씩 입바른 말을 할 때가 있었다. 그는 한 번은 이런 말을 내뱉었다. '성도들은 목회자가 강단에서 불편한 소리를 하면 마음 문을 닫고 은혜 받기를 거부한다'고. 참 정확한 지적이다. 그가 수많은 추종자를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도의 말씀 소비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한 데 있었다. 


그의 일갈처럼 목사가 강단에서 성도의 세속적 이해와 배치되는 이야기를 하면 듣는 이들은 굉장히 불편해한다. 즉, 목사가 물신주의 · 세속주의를 설파하는 것도 문제지만, 성도들 역시 이런 설교를 원한다는 말이다. 


어설픈 양비론을 주장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목회자가 강단에서 예수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교의를 설파할 때 이를 제지하는 임무는 성도들의 몫이다. 하지만 성도들은 자신들의 귀를 긁어주는 설교를 하는 목회자에 열광하며, 혹 이런 목회자에 대한 비판을 제기할라치면 무서울 정도로 정죄를 가한다. 


홍대 새교회 출석 교인들 가운데에는 전병욱의 범죄사실을 아는 이들도 여럿이다. 그들은 그의 범죄사실에 불편해 하면서도 그에게 은혜를 받았던 기억이 있고, 이런 이유 때문에 그를 따라 나섰다. 또 그의 설교를 들으며 자신이 원하는 메시지를 얻어가는 이들의 수도 알게 모르게 많습니다. 즉 성도의 얄팍한 믿음이 그의 목회를 가능하게 하는 자양분이란 말이다. 


생산과 소비의 관계는 늘 흥미롭다. 생산자는 소비자가 원하는 걸 만들어 돈을 번다. 하지만 소비자가 생산자에게 일방적으로 종속된 존재는 아니다. 소비자는 어느 순간 지금 있는 것과는 다른 그 '무엇'을 원한다. 소비자들의 욕망의 괴리는 혁신이란 이름으로 충족되기 마련이다. 전병욱은 구태의연한 성공주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신앙 소비자들의 욕구를 채워 궁극의 성공을 거머줬다.


최근 윤리적 소비가 새로운 흐름으로 떠오르고 있다. 생산원가를 낮추기 위한 저임금 노동 혹은 무분별한 자원 남용으로 인한 환경오염 등이 문제가 되면서 대안적 소비행태로 주목 받는 흐름이다. 윤리적 소비의 핵심은 환경오염이나 저임금 노동 관행으로 만든 제품 소비를 거부하는 한편 생산자에겐 합당한 임금을 제공하고, 오염을 최대한 줄이며 적정한 가격으로 생산된 제품을 사서 쓰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제 교회 안에서 성도가 말씀을 수용하는 패턴 역시 재고를 해야 할 때다. 오로지 자신들의 세속적 욕구를 '성경적으로' 충족시켜주는 목회자의 설교는 단호히 거부할 것, 그리고 당장의 세속적 욕구 보다 복음에 충실한 가르침의 수용에 적극 나서야 한다. 이런 환경이 조성된다면 어느 목회자라도 섣불리 세속적 성공의 미덕을 칭송하지 못하게 되리라. 깨어 있는 성도들의 힘이 절실하기만 하다. 




@ 2010.05. 삼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