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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Diary

에밀 졸라와 드레퓌스, 그리고 사후매수죄

지식인은 민감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해박한 지성과 건전한 상식으로 올바른 해결책을 내놓는 한편, 잘못된 사회적 통념이나 편견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현대 최고의 지식인 하면 단연 장 폴 사르트르일 것이다. 하지만 지식인의 원조는 사르트르보다 한 세기를 앞서 살았던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였다. 




* 에밀 졸라(1840~1902)


에밀 졸라를 논하려면 먼저 드레퓌스 사건을 이야기해야 한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군사법원이 육군 포병대 대위이던 드레퓌스에게 반역죄를 선고한 사건을 말한다. 이에 대해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이 사건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많은 이들이 에밀 졸라와 드레퓌스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안다. 하지만 이 사건의 본질에 대해서는 의외로 잘 모른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프랑스군의 주요 정보를 담은 메모장이 발견된데서 비롯됐다. '명세서'라고 불린 이 메모장엔 프랑스군이 사용하는 포의 도면과 포병 배치도가 세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19세기 말 군 작전운용에서는 포병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었다. 따라서 명세서에 적힌 내용은 주요 군사기밀이었다. 이토록 중요한 기밀이 잠재적 적국인 독일에게 넘어간 것이다. 프랑스는 발칵 뒤집혔다. 




* 알프레드 드레퓌스(1859~1935)


프랑스 군 당국은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공교롭게도 드레퓌스는 유대인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프랑스 사회는 반유대주의 정서가 들끓기 시작했다. 재밌는 대목은 정작 독일 대사관의 군 참사관 슈바르츠코펜은 드레퓌스가 용의자로 지목된 건 말도 안된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극단적 심판여론에 묻혀 전혀 반향을 얻지 못했고 드레퓌스는 귀아나 해변 앞바다에 있는 악마의 섬에 유배되기에 이른다. 


드레퓌스의 가족은 그의 결백을 밝혀 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베르나르 라자르라는 젊은 작가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고 당시 재판의 허점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책을 썼다. 이것이 '법정 오류 -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이라는 제목의 책자였고, 이 책자는 드레퓌스 사건을 재점화하는 계기가 됐다. 


그렇다면 과연 주요 군사 기밀을 적에게 누출시킨 범인은 누구였을까? 바로 보병대 소령인 에스테라지였다. 에스테라지는 문제의 명세서가 발견되기 전 6차례나 독일 대사관과 정보기관을 방문했고, 심지어 드레퓌스 재판이 열리던 와중에도 독일측과 접촉했다. 하지만 프랑스 군 정보당국은 에스테라지의 행적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보병대 장교가 포병 정보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서였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이 대목에서 드레퓌스 재판의 본질이 드러난다. 


드레퓌스 사건 당시 프랑스 군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프랑스 군의 고급장교는 대게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에스테라지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더구나 에스테라지는 정부를 두며 호화생활을 즐기느라 품위 유지비가 많이 필요했다. 반면 드레퓌스는 자수성가한 유대인 출신으로서 근대식 군사교육을 받은 신세대 엘리트였다. 만약 그가 근대식 군사교육을 받지 않았고, 더욱 중요하게는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결국 드레퓌스 사건은 군 기밀정보 누출이 빌미가 됐지만 구귀족과 신세대 엘리트 사이에서 불거진 세대간 알력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드레퓌스에 대한 기소는 잘못된 것이었음이 명확해졌다. 하지만 군 엘리트는 여전히 귀족적 속물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진실 규명보다 드레퓌스 판결을 뒤짚어 엎었을 때 벌어질 군 체면 손상을 더 걱정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에밀 졸라가 등장한다. 에밀 졸라는 당시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이던 펠릭스 포르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역겨운 드레퓌스 사건이 당신의 이름을, 아니 당신의 정권 그 자체를 더럽히고 있씁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진실과 정의를 파괴하는 최악의 오점입니다. 일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프랑스는 더럽혀졌습니다. 역사는 당신의 정권 아래에서 프랑스 사회를 배반한 범죄가 자행되었다고 기록할 것입니다."


에밀 졸라의 이 한 마디는 프랑스 사회를 논란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그는 무엇보다 자칫 유대인 출신 장교 한 명이 떠안아야 했을지도 모를 프랑스 사회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냈다. 그의 행동은 지식인이라는 신조어를 낳았으며 사회적 공인이 사회와 역사 앞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마련해 주었다. 


추석연휴를 불과 이틀 앞둔 시점에서 대법원은 곽노현 교육감에게 후보자 사후매수죄라는 해괴망측한 법리를 동원해 유죄를 선고했다. 후보자를 사퇴한 데 대한 대가를 준 것이 죄라는 것이다. 곽 교육감측 변호인은 사후매수가 유죄로 인정된 사례는 46년 전 일본 말고 곽 교육감이 유일하다고 했다. 


우리 편, 가진 편은 아무리 죄가 커도 이리 깍이고 저리 깍이지만 저쪽 편, 힘 없는 편은 조그마한 죄도 중형이 되고 없는 죄까지 생겨난다. 과연 곽 교육감이 '저쪽'이 아니라 '우리'였다면 이런 해괴한 법리를 동원해 유죄를 선고하는 일이 벌어지기나 했을까? 


이런 말도 되지 않는 기소에 대해 소위 영향력께나 있다는 식자층들은 말 한 마디 없다. 언론은 그저 논란이 되고 있다고만 이야기할 뿐, 기소 자체의 정당성에 대해선 입에 올리지 조차 않는다. 그저 여론만 들끓을 뿐이다. 


1세기 전 에밀 졸라는 진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한 프랑스 군 당국은 물론 프랑스 전체를 향해 준엄한 일침을 날렸다. 하지만 이 나라의 식자층들은 그저 힘 가진 쪽에 줄 댈려고 촉수를 날름 거린다. 그것이 진실과 정의를 파괴하는 오점인줄도 모르고서.... 


이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치일 수 밖엔 없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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