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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 싶다

문학기행] 미당의 발자취를 따라

 
* 선운사의 가을

 
문학기행] 미당의 발자취를 따라


온 세상이 온통 화사한 단풍의 물결로 뒤덮이는 가을, 불현듯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인다. 두 손에 가을 풍경을 담을 조그만 카메라가 쥐여져 있다면 주저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단지 멋진 풍경을 담는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카메라에 담긴 가을 풍경에 문인의 체취가 담겨져 있다면 금상첨화다. 곧 우리 곁을 찾아올 가을, 카메라를 들고 문인의 체취를 담아 보자.
 

문인을 찾아 떠나는 여행의 목적지로 전북 고창을 권한다. 고창은 미당 서정주(1915~2000)의 고향이다. 고창은 미당 서정주 외에도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의 고향이기도 하다. 한편 이른 봄에 고창을 찾으면 청보리의 물결을 만날 수 있다. 매년 이른 봄 열리는 청보리밭 축제엔 전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서울에서 고창까지는 약 294km. 그닥 만만한 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서해안 고속도로 개통에 힘입어 고창을 찾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봄에 청보리밭 축제를 보았다면 가을엔 선운사의 단풍을 봐야한다. 고창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선운사, 선운사는 가을이 오면 반드시 가봐야 할 명소로 꼽힌다. 그도 그럴것이, 가을 단풍으로 곱게 치장한 선운사의 자태는 매혹적이기 그지 없다. 그렇지만 선운사의 가을 풍경은 너무나도 많이 알려져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찾는 곳이기에 오히려 진부하게까지 보인다.

 
그렇지만 선운사가 우리나라 문단의 거장 서정주 시인과 각별한 사이였음을 알게 되면 선운사에서 느끼는 정취는 새삼 특별하게 다가온다. 미당 서정주 시인은 선운사를 거닐며 시상(詩想)을 떠올렸다. 그래서인지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로 시작하는 서정주 시인의 시 <선운사 동구>엔 시인이 선운사에 갖는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시인의 애정에 화답하듯 선운사 입구엔 서정주 시인의 시비가 서 있고 이 시비엔 <선운사 동구>가 선명히 각인돼 있다.
 
 
가을 여행의 명소 답게 선운사 초입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울긋불긋한 자태가 나그네의 눈을 매혹시킨다. 단풍의 유혹에 취해 손을 뻗어 붉게 물든 단풍잎을 만질라 치면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그 위로는 짙푸른 가을 하늘이 걸려 있다. 이 광경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노라면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의 곡조가 절로 떠오른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 서정주, <푸르른 날>



* 미당 서정주 묘소 가는 길은 노란 국화로 뒤덮여 있다.



* 서정주 문학관



* 미당 서정주 선생의 친필 서명
 

미당 서정주의 고향은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다. 선운리로 발걸음을 돌리면 미당 서정주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 그리고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생가 가까이에 문학관이 있고 문학관 너머에 묘소가 있어 한 걸음으로 돌아볼 수 있다. 시인의 유명한 시집 <질마재 신화>의 무대인 질마재도 볼 수 있다. 질마재는 시인의 고향마을 이름이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말자. 그저 여느 시골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고개길일 뿐이다. 질마재를 지나면 바로 시인의 묘소다.

 
생가와 문학관, 그리고 묘소는 온통 노랑 국화 일색이다. 특히 시인의 묘소 일대는 노랑 국화의 바다다. 문학관 전망대에서 묘소를 바라보면 마치 노랑 물결이 일렁이는 듯 보인다. 이쯤되면 얼른 시인의 대표작 <국화 옆에서>가 떠오를 것이다. <국화 옆에서>의 마지막 연이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서정주, <국화 옆에서>
 

고창은 가을이면 국화의 물결로 뒤덮인다. 이곳에선 매년 국화축제가 열리며 올해로 여덟 번째를 맞이한다. 미당을 기리기 위해 미당 문학제도 열린다. 이 때는 30만 평이 이르는 대지가 다 노랑 국화의 물결로 뒤덮인다. 가녀린 시어로 생명 탄생의 긴박한 순간을 노래한 시인에게 시인의 고향이 선사하는 선물이리라.
 

노오란 국화꽃 향기를 맡으며 바라보는 고창 풍경은 그래서 각별하다. 고창은 우리나라 문단의 거목으로 우뚝선 시인의 체취가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의 과거 행적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는 건 사실이다. 일제의 야수적인 침탈, 동족간의 골육상쟁, 총칼로 정권을 찬탈한 군사정권의 철권통치.... 미당의 속 사람은 살벌했던 우리네 현대사의 질곡을 감당하기엔 너무나 여렸다. 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살벌했다. 이런 미당에게 투사적 소명을 기대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고창을 뒤덮은 울긋불긋한 단풍, 그리고 노오란 국화 꽃잎은 가장 가까운 이들과 함께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며 푸르른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