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표 부스, 참 아쉽습니다
[4.13 총선 선거참관 후기] 유권자에 대한 배려, 더 신경쓰길
이번 4.13 총선은 제겐 특별했던 선거로 남을 것입니다. 1992년 치러진 제14대 총선부터 투표를 해왔는데, 처음 투표장에 갔을 때보다 이번 총선의 기억이 더 강렬합니다. 이전까지 선거 때만 되면 투표장 찾아서 한 표 찍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하나, 이번 총선엔 참관인으로 현장을 쭉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제가 있었던 곳은 충남 천안을 지역구 내 불당동 제5투표소였습니다. 이곳 투표인원은 사전투표자를 제외하고 투표인원이 2800여 명에 불과한 작은 투표소였습니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유권자들의 열의는 대단했다고 봅니다. 새벽부터 내리친 비 때문인지 오전은 비교적 한산했습니다. 그러다 오후 3시를 넘기면서 유권자들은 쉴 새 없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이곳 투표소 사정은 나았다고 합니다. 투표 사무원에게 들으니 다른 투표소의 경우 유권자들이 하도 쇄도해서 사무원들이 식사도 제대로 못했다고 했습니다.
▲ 이번 4.13총선에서 참관인 자격으로 선거 현장을 지켜보았다. ⓒ luke wycliff
전국 평균 투표율도 비슷했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집계를 보니 시간대별 투표율이 오전 11시엔 16.1%에 그쳤다가 오후 1시 37.9%, 오후 2시 42.3%, 오후 3시 46.5%, 오후 4시 50.2%를 기록하는 등 투표 종료시간에 가까워질수록 투표율이 치솟았습니다.
선거를 치르기 전까지만 해도 혹시 부정선거가 이뤄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컸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불당동 제5투표소에서는 아무런 불상사가 없었습니다. 투표가 종료되고, 투표함을 봉인하는 스티커에 제 이름을 적어 넣는 순간 '아, 잘 끝났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이번 선거의 특징을 '참여'로 요약하고자 합니다. 먼저 선거 참여 열기가 예년과 달랐습니다. 제가 참관했던 불당동 제5투표소의 경우 총 1336명의 유권자가 투표했습니다. 투표율로 따지면 47%로 전국 평균 58%에 비해 낮은 수준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담당 선거 사무원은 투표율이 지난 총선에 비해 10%p가량 높아졌다고 했습니다. 전국적으로도 이번 총선 투표율은 지난 19대 총선 대비 4%p 높아진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선거 과정에서 보여준 참여 열기는 더욱 고무적이었습니다. 참관인으로 선거를 지켜보면서 틈틈이 SNS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몇몇 페이스북 사용자들이 특정 정당으로부터 선거운동 문자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알려 왔습니다. 그래서 제 SNS 담벼락에 관련 문자를 갈무리해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투표소에 담당 공무원이 나와 있기에 불법성 여부를 금방 확인할 수 있어서였습니다. 이러자 정말 수많은 '페친'(페이스북 친구)들이 댓글로, 혹은 문자 메시지로 갈무리 화면을 보내왔습니다. 전 이렇게 받은 자료들을 담당 공무원에게 보여주며 유권해석을 의뢰했고, 그 결과를 페친들에게 알렸습니다.
선거 결과를 보니 유권자들은 변화를 갈망했다고 봅니다. 물론 아쉬움은 남습니다. 특히 세월호 참사 피해지역인 경기도 안산 단원구 갑·을 선거구의 선거결과가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억장이 무너졌는데, 세월호 유가족들의 심경은 어땠을까요? 유경근 4·16세월호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자신의 SNS에 자신의 심경을 여과없이 토로했습니다.
유권자 배려 없는 기표 부스
또 한 가지 아쉬움을 적어 보려합니다. 투표소에 설치된 시설물을 보니 유권자들이 푸대접 받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 시설물이란 바로 기표소입니다.
기표소는 투표용지를 받아든 유권자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선택하는, 아주 중요한 공간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사용중인 기표소는 유권자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우선 기표소 공간이 너무 좁습니다.
키가 크고 체구가 건장한 유권자가 입장했을 때, 기표소가 꽉차 보였습니다. 175cm 가량으로 보이는 유권자가 기표소로 들어가 투표하는 광경을 봤는데 부스 밖으로 머리 하나가 나와 있었습니다. 게다가 재질도 견고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 투표소에 마련된 기표부스는 유권자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모습이다. 키가 조금만 커도 부스 밖으로 머리가 노출되고, 공간은 너무 비좁다. 재질도 허술해 보인다. ⓒ luke wycliff
가림막은 더욱 어처구니 없었습니다. 가림막은 부스에 걸쳐 놓았는데, 살짝만 힘을 줘도 가림막이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제가 참관하던 투표소의 경우, 하도 자주 가림막이 떨어지니까 담당 선거 사무원이 청테이프로 고정해 놓아 그나마 유권자들의 불편이 덜했습니다.
혹시 하는 마음에 다른 나라의 기표부스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검색해봤습니다. 미국은 각 주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기표소 공간이 널찍하고, 높이도 높았습니다. 농구선수 같이 키가 보통사람보다 월등히 크지 않다면 머리가 노출될 것 같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또 가림막이 있는 부스도 있고, 없는 부스도 보였습니다. 영국과 호주는 아예 가림막이 없었습니다. 가림막이 있는 경우 커튼 형이어서 마음 먹고 잡아 당기지 않는 한 떨어져 나갈 것 같아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어느 나라도 우리나라처럼 박스재질을 사용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사용하는 칸막이 책상을 사용했거나, 나무 재질을 사용해 마치 집에서 사용하는 가구 같은 느낌을 준 부스도 있었습니다. 이런 부스라면 유권자들이 투표하는데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라고 봅니다. 혹시 제 이야기가 의심스러우시다면 '구글'에 접속한 다음 검색창에 'voting booth'라는 키워드를 입력해 검색결과를 보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기표소가 참으로 허술하다는 점이 금방 눈에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거가 만능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선거는 현대 민주정치 과정의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또 유권자들이 모처럼 주인임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이토록 중요한 날이라면, 선거를 주관하는 관계 당국은 유권자들이 조그만 불편이라도 느끼지 않도록 시설물 설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어야 합니다. 현장에서 보니, 이런 배려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선거는 끝났습니다. 선거는 대의 민주주의의 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표를 던져준 정치인들이 국회로 들어가서 제 할 일을 제대로 하는지, 혹시 불의한 세력과 결탁해 사리사욕만 추구하는 건 아닌지 면밀히 감시해야 할 의무가 남았습니다. 국민들이 정치에 적극 관심 갖고 정치가 일탈하지 않도록 감시할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완전해집니다.
정치가 악해지면 국민이 고통받음을 지난 8년 동안 절감해 왔습니다. 이제 정치가 더 이상 정상궤도를 일탈하지 않도록 더욱 열심히 참여해야겠습니다. 저도 작은 힘 보태겠습니다.
[오마이뉴스 201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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