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센트로도 연기하던 스네이프, 알란 릭맨 잠들다
<다이하드>의 한스 그루버로 명성... 애틋한 순애보 연출하기도
▲ 알란 릭맨(1946~2016) ⓒ 독일 <빌트>
영국 배우 알란 릭맨이 현지시각으로 지난 14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9세.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타임라인은 그에 대한 추모글로 넘쳐나고 있다. 지난해 4월 리마 호튼과의 결혼 소식으로 한 바탕 떠들썩했었는데, 불과 1년도 안 돼 부고가 날아드니 인생 참 덧없다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리마 호튼과의 결혼은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연기했던 세베루스 스네이프의 순애보와 판박이였다. 두 사람은 각각 19세와 18세 때인 1965년 처음 만났고, 이후 줄곧 함께해 오다 2012년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알란은 이 사실을 독일 타블로이드 신문인 <빌트>지와의 인터뷰에서 털어놨다.
원작자의 기대에 충실히 부응했던 스네이프
▲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세베루스 스네이프를 연기하는 알란 릭맨의 모습. 발음마저 연기로 승화하는 그의 독특한 영국식 악센트는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세베루스 스네이프 교수는 J.K. 롤링의 원작 소설에서 가장 신비감이 묻어나는 캐릭터다. 스네이프는 불사조 기사단 단원으로 호그와트 마법학교에서 어둠의 마법 방어술을 가르친다. 그는 제자인 해리 포터를 시종 힘들게 괴롭히면서도, 해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마다 마법을 발휘해 해리를 구해낸다.
그의 존재감은 해리가 볼드모트와 최후의 대결을 준비하는 순간 극적으로 드러난다. 사실 그의 정체는 덤블도어가 볼드모트 진영에 심어 놓은 이중 첩자였었고, 볼드모트는 이를 너무 늦게 알아챘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린다. 이 대목은 <해리포터> 시리즈의 백미였다.
그가 목숨을 버린 속사정은 더욱 비극적이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해리의 엄마인 릴리를 흠모했다.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그는 이루지 못한 사랑을 해리에게 쏟는다. 스네이프의 인상은 음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는 볼드모트의 손아귀에서 호그와트를 구해내기 위해 선택된 희생제물이었다.
알란은 무뚝뚝한 인상과 약간은 기분 나쁜 영국식 악센트로 스네이프를 연기해 냈다. 원래 영국식 악센트는 우아한 발음과 억양으로 듣는 이들에게 독특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알란의 입에서 나오는 스네이프의 악센트는 소름 끼친다. (알란, 그리고 <매트릭스>의 휴고 위빙은 영국식 악센트를 가장 기분 나쁘게 구사하는 배우일 것이다.)
원작자 롤링은 스네이프를 연기할 배우로 알란을 지목했고, 알란은 원작자의 기대에 훌륭하게 보답했다.
너무 일찍 가버린 건 아닐까
▲ 영화 <다이하드>에서 악역 한스 그루버를 연기한 알란 릭맨. 그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뉴요커
알란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존 맥티어난 감독의 1988년 작 <다이하드>에 출연하고부터였다. 그는 특유의 기분 나쁜 영국식 발음과 냉철함으로 악당 한스 그루버 역을 소화해 냈다. 이 작품은 28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주인공 존 매클레인 형사가 온갖 죽을 고생(다이 하드)을 하는 상황이 특히 그렇다. 그러나 존 매클레인의 영웅적 활약을 돋보이게 한 존재는 한스 그루버였다.
한스 그루버는 독일 출신 테러리스트로 극한의 몰염치를 몸소 보여준다. 그루버 일당은 크리스마스이브를 틈타 나카토미 그룹의 상징인 나카토미 타워를 장악한다. 이어 창업주인 다카기 회장과 임직원들을 볼모로 잡고 인질극을 벌인다. 이들은 거창한 명분을 내걸었지만 기실 이들이 노린 건 나카토미 그룹이 보유한 현금자산이었다.
한스 그루버는 리더로서 시종일관 냉정하게 상황을 지휘한다. 부하 중 한 명이 매클레인에게 동생을 잃고 복수심에 날뛰자 그를 다독이기도 한다. 매클레인과 마주해서는 뛰어난 연기력으로 자신을 숨기기도 한다.
알란의 능수능란한 연기는 브루스 윌리스만큼이나 뛰어났다. 브루스 윌리스가 존 매클레인 형사에 안성맞춤이었다면, 한스 그루버는 오로지 알란을 위한 캐릭터였다. <다이하드>는 2013년까지 총 다섯 편이 나왔다. 놀랍게도 오리지널 이후 네 편의 시리즈에 등장한 어떤 악당도 한스 그루버를 뛰어넘지 못했다. 존 맥티어난은 3편을 연출하면서 대배우 제레미 아이언스를 한스의 친형 사이먼 역에 기용했다. 그러나 제레미 아이언스 조차 알란의 연기에 비하면 어딘가 부족하다는 인상이 역력했다. 그만큼 알란의 연기는 탁월했다.
그는 이후 <로빈 훗>, <마이클 콜린스>, <러브 액츄얼리> 등에 출연하며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그는 자선활동에도 활발하게 임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활동하는 연기자들을 돕는 단체인 '인터네셔널 퍼포머스 에이드 트러스트(International Performers' Aid Trust)' 명예회장을 지내는가 하면, 얼굴 관련 질병을 연구하는 자선기관인 '세이빙 페이시스(Saving Faces)'를 후원하기도 했다.
알란의 부고가 전해지자 롤링과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헤르미온느’역을 연기했던 엠마 왓슨은 각자의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다.
▲ 알란 릭맨의 부고가 전해지자 <해리포터> 시리즈의 원작자인 J.K. 롤링이 남긴 트윗 ⓒ J.K.롤링 트위터
"알란의 부고를 듣고 얼마나 슬프고 놀랐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는 굉장한 배우였고, 멋진 남자였다."
▲ 엠마 왓슨은 알란에게 ‘사랑한다’는 추도사를 적었다. ⓒ 엠마 왓슨 트위터
"오늘 알란의 소식을 듣고 무척 슬펐다. 이토록 특별한 남자이자 배우와 함께 작업하고 시간을 보낸 건 행운이라고 느낀다. 우리가 나눴던 대화가 진정으로 그리울 것이다. 알란, 평안 가운데 잠들기를. 우리는 당신을 사랑해요."
아마 그를 사랑하는 모든 팬이 같은 심정일 것이다. 리마와 결혼식을 올린 뒤 단출하게 점심을 먹으며 행복해하던 알란. 69세라는 나이가 그리 적은 편은 아니지만, 그를 사랑했던 팬의 한 명으로서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것만 같다.
"배우는 변화를 가져오는 사람이다." - 알란 릭맨(1946~2016)
[2016.01.15.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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