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를 보고 든 느낌을 적어 <오마이뉴스>에 기고 했는데 반응이 꽤 거칠었다. 이런 거에 신경쓰고 싶지는 않지만 ‘보는 내내 사회적 의미와 결부시킬 생각만 한다’는 반응에 대해선 한 마디 적어야 겠다. 난 학창 시절 서울대 영문과 김성곤 교수의 영화 리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래는 김 교수의 책 일부다.
사람들은 이제 책을 꺼내 펼치는 대신 마치 책처럼 진열돼 있는 비디오 테이프나 DVD를 꺼내 재생기에 넣고 리모콘을 누른다. 그러면 화면에는 끝없는 환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맥루언이 '쿨 미디어'라고 부른 하이테크 전자매체를 통한 이와 같은 변화는 이제 독자들의 책읽기뿐만 아니라 작가들의 글쓰기에 대한 개념에도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를 가져다 주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변화는 앞으로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영상문화는 이제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젊은이들에게 좋은 영화를 골라주고 제대로 된 영화 읽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될 것이다. 영화의 분석을 통해 인생을 성찰하고, 그 나라의 문화와 사회를 배우며, 그 민족의 심리와 신화를 파악하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 김성곤, <김성곤의 영화기행>
문학작품은 그 시절의 대중 문화였다. 문학 작품을 보면서 무수한 상징을 찾고 당대 사람들의 의식을 탐구하며, 그 시대를 읽으면서 영화는 왜 그렇게 못할까? 영화를 어떤 식으로 보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활자매체 보다 훨씬 더 강력한 파급효과를 갖는 매체가 영화이고, 그렇기에 인문-사회 택스트로서의 영화비평은 너무도 중요하다. <스타워즈>의 경우를 봐도 이동진 기자는 조선일보 재직 시절이던 1997년 4월11일자 기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스타워즈는 현대인 구미에 맞게 각색한 고대 영웅신화 구조를 갖고 있다. ... 스타워즈는 풍부한 문화 기호들을 지니고 있다... 스타워즈가 궁극적으로 전체주의에 대한 개인주의의 승리를 그리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의미와 결부시키려만 한다’는 식의 비방은 영화란 대중예술 장르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낼 뿐이다. 또 영화의 흥행은 그 시절 분위기에도 일정 수준 영향을 받는다는 건 정설이다. 우리 시대 수많은 ‘을’들이 갑질 횡포에 노출된 시절이니 <베테랑>이 반향을 일으킨 것이고 <암살>은 새삼 청산되지 않은 우리 현대사를 일깨워 수많은 담론을 생산하지 않았던가?
이 같은 입장을 자기 변명이라고 되받아 치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외국에서는 인문-사회적 시각으로 영화를 비평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점은 분명 밝혀두고는 싶다. 익명성에 기대 무식을 드러내지는 말아주었으면 한다.
시대정신 빈곤한데... 비주얼만 깨어났나
[리뷰] <스타워즈> 시리즈의 새 에피소드, 올드팬 향수에만 기대려 해
▲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의 한 장면. 화려한 비주얼이 압도적이다.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상상력 고갈인가? 얄팍한 상업주의인가?
<스타워즈> 시리즈의 새 에피소드 <스타 워즈 : 깨어난 포스(The Force Awakens)>를 보면서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의문이다. 연출자인 J.J. 에이브럼스는 <스타워즈> 향수를 자극하기로 아주 작심한 듯하다. 그는 영화의 오프닝에서 대배우 맥스 폰 시도를 등장시킨다. 맥스 폰 시도의 풍모는 <스타워즈> 오리지널에서 오비완 캐노비 역을 맡았던 알렉 기네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뿐만 아니다. 저항군의 X윙 파이터와 제국의 타이 어드밴스드가 벌이는 치열한 공중전은 1977년 첫 에피소드 <새로운 희망>에서 다스 베이더와 루크 스카이워커의 싸움을 옮긴 것이다. 무엇보다 한 솔로(해리슨 포드)와 츄바카가 '밀레니엄 팔콘'호를 타고 은하계를 누비는 장면은 올드팬들의 향수를 한껏 자아낸다. 특히 한 솔로 역의 해리슨 포드는 신작에서도 녹록지 않은 연기 내공을 뽐낸다.
마즈 카나타 주점에서 주인장인 마즈 카나타와 레이(데이지 리들리)가 나누는 대화도 빼놓을 수 없다. 레이는 주점에서 우연히 루크 스카이워커가 쓰던 라이트세이버(광선검)를 발견한다. 이때 그녀의 내면 깊이 자리한 포스가 꿈틀거림을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포스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치려 한다. 이때 마즈 카나타가 그녀에게 다가와서 포스를 일깨워준다. 아마 오리지널 스타워즈 시리즈를 기억하는 이라면 금방 알아 챌 것이다. 마즈 카나타와 레이의 대화는 오리지널 에피소드 <스타워즈 : 제국의 역습>(1980)에서 마스터 요다와 루크 스카이워커가 나눴던 선문답임을 말이다.
영화의 모티브 역시 오리지널을 충실히 계승한다. 오리지널 에피소드에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악의 화신 다스 베이더가 실은 루크 스카이워커의 아버지임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제국의 역습>에서 다스 베이더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루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며 "내가 너의 아버지다"라고 고백한다. 이 대사는 일대 충격파를 일으켰고, 35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되는 명대사로 자리 잡았다.
사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서구 신화에서는 흔하게 나타나는 모티브다. 조지 루카스는 옛 신화를 SF장르에 과감하게 끌어왔다. J.J. 에이브럼스는 다스 베이더-루크 스카이워커 사이의 갈등을 한 솔로와 카일로 렌(아담 드라이버)에게로 옮긴다. 가계도로 따지면 다스 베이더는 카일로 렌의 외할아버지다. 스카이워커 가문이 30년 넘게 우주의 질서를 혼란시키는 주범으로 등장하니, 가히 족보란 무시할 수 없나 보다.
J.J. 에이브럼스, 작심하고 향수 울궈내다
▲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에 출연한 해리슨 포드. 그의 등장은 올드팬들의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이렇게 연출자 J.J. 에이브럼스는 영화 곳곳에 미끼를 던져 놓고 올드팬들의 구미를 자극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구태여 오리지널 에피소드를 찾아 볼 필요는 없다. 21세기의 관객을 위해 화려한 비주얼로 화면을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J.J. 에이브럼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 <E.T.>를 보면서 꿈을 키운, 말하자면 '스필버그 키드'다. 그는 15세 때 스필버그가 슈퍼 8mm 카메라로 찍은 초기작을 편집한 적도 있었다. 그의 2011년 작 <슈퍼 8>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자전적 고백이었다. 루카스 필름을 인수한 디즈니는 그에게 새 에피소드 연출을 맡겼다. 경력으로 볼 때 적임자를 찾은 셈이다. 게다가 그는 이미 11세 때 <스타워즈> 오리지널을 접한 바 있었다. 그의 말이다.
"어린 시절 <스타워즈> 시리즈는 나에게 굉장한 존재였으며, 당장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세계였다."
스필버그 키드답게 그는 <스타워즈> 시리즈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데 성공한다. 사실 조지 루카스가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내놓은 <보이지 않는 위험>, <클론의 습격>, <시스의 복수>는 진부하게만 보였다. 세상은 오리지널이 첫선을 보였던 1970년대와 달리 선악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특수효과는 다큐멘터리 필름에 배우가 들어가 연기하는 수준으로까지 진화했다. 특히 관객들은 제다이의 광선검 결투보다 <매트릭스>의 스타일에 더 열광했다. <깨어난 포스> 역시 선악의 대립 구도를 극복하지 못한 모습이지만, J.J. 에이브럼스는 이런 한계를 전통의 충실한 계승으로 돌파해 나간다.
에이브럼스의 시도는 성공을 거둔 듯하다. 북미에서만 개봉 첫날 우리 돈 1424억 원을 벌어들였고, 이는 역대 최고기록이다. 게다가 극장마다 스타워즈 복장을 한 관객들로 북적이고, 백악관에까지 스타워즈의 스톰트루퍼 군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비주얼에 감춰진 빈곤한 시대정신
▲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는 옛 향수에만 기대려 할 뿐,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아내지는 않았다.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그러나 상상력 부재는 어쩔 수 없이 짚고 넘어가야 한다. <깨어난 포스>가 향수를 자극하는 데는 성공을 거뒀을지 몰라도, 시대정신을 담아내지는 못했다.
오리지널이 처음 나온 1977년 미국은 베트남전 패배 후유증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소련을 축으로 하는 '공산주의 제국'은 욱일승천하는 것 같았고, 반면 미국은 왜소해 보였다. 은하계의 지배를 꿈꾸는 황제와 그의 심복 다스 베이더는 공산제국의 은유였다. 이런 은유는 분장에서도 엿보인다. 제국의 지휘관들이 입고 있는 제복과 '스톰트루퍼'는 각각 소련군과 나치 독일군을 모델로 했다.
반면 루크 스카이워커와 레이어 공주, 그리고 제국에 맞서는 반란군들은 죄다 고만고만하다. 얼핏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저항군의 모습은 베트남전 패배 악몽에 시달리는 미국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스타워즈> 오리지널의 성공은 시대정신을 담아낸 데 힘입은 결과였던 셈이다.
2000년대 초반 루카스가 내놓은 에피소드 1, 2, 3편은 실망스러웠지만, 여기서도 시대정신은 읽힌다. 특히 2005년 작 <시스의 복수>는 무척 의미심장하다.
조지 루카스는 고별작 <시스의 복수>에서 다스 베이더의 기원, 루크-레이어 남매의 출생 등 <스타워즈> 시리즈를 관통하는 모티브를 풀어낸다. 이중 가장 주목할 만한 지점은 '제국'의 탄생 비화다.
펠퍼타인 공화국 의장은 '전시상황'을 명분 삼아 친정체제 구축에 나선다. 제다이 기사단은 펠퍼타인의 음모를 눈치채고 제동을 걸려 한다. 이러자 펠퍼타인은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유혹해 제다이 기사단 제거에 나선다.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활약에 힘입어 펠퍼타인은 최대 걸림돌을 치우는 데 성공한다. 펠퍼타인은 의회에 나가 '자유', '정의', '안보'를 실현할 제국이 출범했음을 선포한다. 의회는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하고, 상원의원 자격으로 의회에 참석한 아미달라는 이런 말로 깊은 아쉬움을 드러낸다.
"자유 민주주의는 박수로 종말을 고했군."
이제 펠퍼타인은 거침이 없다. 먼저 자신은 황제로 등극한 다음, 권력장악에 일등공신 역할을 한 아나킨 스카이워커에게 '다스 베이더' 작위를 수여하고 후계구도를 약속한다. 이어 두 사람은 은하계 장악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이 같은 광경은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는 것 같다. 무엇보다 펠퍼타인이 공화주의를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황제로 등극한 장면에서 '민주제국'임을 자처하며 침략전쟁에 나선 미국의 민낯이 엿보인다. 실제 <시스의 복수> 개봉을 전후해 당시 대통령이던 조지 W. 부시를 다스 베이더에 빗댄 패러디들이 쏟아져 나왔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자기 확신에 가득한 자유 민주주의자들의 승리를 찬미했던 루카스가,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선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한 건 묘한 역설이다.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이 정치의 진보를 담보하는 건 아님을 깨달은 것인가?
에이브럼스의 신작은 훌륭한 오락일 수는 있겠으나, 21세기의 시대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여성인 레이가 포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흑인이 조력자로 나선다는 점에선 오리지널보다 진보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이 지점에서 <스타워즈> 오리지널과 프리퀄의 주인공들이 백인 남성이었고, 여성(레이어 공주와 아미달라)은 기껏해야 보조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할리우드는 리메이크, 리부트에 매달리는 모습이다. <터미네이터 : 제니시스>, <쥬라기 월드> 등이 대표적이다.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도 이런 흐름에 이름을 올렸다. 이 가운데 <깨어난 포스>가 가장 돋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오리지널의 아우라에 기대 돈벌이를 시도한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기발한 상상력을 지녔거나, 시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인재들이 헐리우드에 무관심한 걸까? 스마트폰, 태블릿 PC, 스마트 워치 등등 요새 나오는 IT기기들을 보고 있자니 괜찮은 인재들이 영화보다 IT산업에 더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201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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