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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가톨릭은 마리아 숭배 종교 아냐”

[인터뷰] “가톨릭은 마리아 숭배 종교 아냐”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 소장 인터뷰 1부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 소장의 주된 관심은 ‘가난’이다.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인 김 소장은 늘 가난을 통해 예수를 조명하려 한다. 이 같은 관심은 해방신학의 핵심 주제와 궤를 같이한다.  


그는 또 해방신학의 본고장인 라틴 아메리카에서 수학한, 국내에서 보기 드문 해방신학자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이해도 남다르다. 그는 교황 방한에 앞서 교황 안내서인 『교황과 나』를 펴냈다. 교황 방한 기간 동안엔 <연합뉴스TV>, <JTBC> 등 여러 언론에 출연하는가 하면 <한국일보>, <경향신문> 등에 기고를 통해 교황이 이 나라에 남긴 족적과 그 의미를 상세하게 풀이해주기도 했다.   


사실 그는 처음엔 사제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신학자의 길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그는 사제와 신학자 두 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할까?  


“두 길 다 잘 맞지 않는다. (웃음) 사제의 길을 가기에 인품과 신앙심이 부족하다. 한편 신학자로서 지능과 감동이 부족하다고 본다. 굳이 두 길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신학자가 더 맞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해방신학의 본고장이라 할 엘살바도르에서 해방신학을 공부했다. 당시 엘살바도르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해방신학을 백안시하던 분위기도 그의 발걸음을 어렵게 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1996년 독일에 있다가 다음 해 엘살바도르로 건너갔다. 신학도로서는 물론 엘살바도르에 유학한 한국인은 내가 유일하다. 가톨릭의 역사에서 볼 때 당시는 요한 바오로 2세 집권시기로 해방신학은 고난의 행군을 겪었었다. 따라서 해방신학 공부를 위한 유학은 주변의 지인들을 쉽게 납득시키기 어려웠다. 당연, 많은 이들이 반대했고 만류했다.   


현지 상황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엘살바도르에 도착했을 때는 내전이 종료된 지 5년 밖에 지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엘살바도르는 내전을 통해 7만5,000명이 죽고 1만 명이 실종됐다. 피난민만 100만 명에 이른다. 상점, 약국 등엔 쇠창살이 쳐져 있어 주인과 손님이 서로 접촉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밖에는 무장경호원이 서 있었다. 정말 막막하기만 했고,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현지에 있으면서 문득 ‘외국인의 눈에도 그랬으니 현지 원주민들은 얼마나 끔찍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불평만 하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무슨 배짱으로 그곳에 유학 갔는지 모르겠다. 아마 철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지금 같았으면 이것저것 많이 따졌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그곳에 데려갔다고 본다.”   


‘구원자 하느님’의 땅에서 해방신학 세례를 받다 


엘살바도르는 스페인어로 ‘구원자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비록 상황은 어려웠지만, 나라 이름답게 그곳엔 큰 인물 셋이 동시대를 살았다. 그가 엘살바도로 향한 이유도 이 점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엘살바도르엔 큰 인물이 세 분 계셨다. 목회자로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신학자로 혼 소브리노 신부, 철학자로 에야꾸리야 신부가 그들이다. 로메로 대주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모범을 보인 분이다. 나의 스승이기도 한 혼 소브리노는 기독론에서 해방신학의 대표자다. 그리고 에야꾸리야 신부는 해방신학에서 철학의 기초를 놓은 분이다. 세 분이 한 나라에 계시니 공부하기엔 유리했다. (오스카 로메로 주교와 에야꾸리야 신부는 각각 80년과 89년 순교했다) 또 현지인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엘살바도르는 해방신학을 공부하기에 모든 상황을 압축시켜 놓은 모범적인 나라였다. 가난이 있었고, 정치적 억압과 내전, 경제적 수탈이 횡행했다. 상황이 그랬단 말이다.”   


얼마 전 희소식이 전해졌다. 지난 2월 초,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에 대해 가톨릭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한 순교자임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이번 선언에 따라 로메로 대주교 시복식도 곧 있을 전망이다. 해방신학자로서 김 소장은 이 소식을 누구보다 반갑게 여겼다.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 소식에 그 누구보다 현지인들이 기뻐했을 것이다. 나 자신 역시 무척 기뻤다. 그곳에서 살다온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교회가 정의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을 처음으로 순교자로 인정해줘서 그렇다. 늦은 감이 있지만 너무 감사한 일이다.” 


로메로 대주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면서 화제는 자연스럽게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옮겨갔다.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 인정은 프란치스코 교황에 힘입은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착좌한 이후 가장 먼저 착수한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절차 재개였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다시 한 번 ‘교황 전문가’로서의 진면모를 드러낸다. 


“만약 베네딕토 교황이 계속 집권하고 있었다면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은 늦춰졌을 것이다. 비록 프란치스코 교황이 예수회 출신이기는 하지만, 그 분은 말씀과 행동, 특히 설교에서 해방신학자의 이름과 낱말을 빌리지 않고서도 해방신학의 내용을 능숙하게 표현한다. 예를 들어보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부의 불평등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교황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반응은 잠잠하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 같은 말을 했다면 교회 안팎에서 즉각 사회주의자니, 마르크스주의자니, 무신론자니 하는 식의 비난이 끊이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또 ‘규제되지 않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는 교황의 발언은 해방신학자의 주장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대화 중간 다소 민감한 주제를 던졌다. 구교와 신교 사이의 편견의 장벽이 그것이다. 사실 기독교 교회 내에선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한다. 특히 교단에 따라선 ‘마리아 숭배신앙’이라면서 가톨릭을 이단시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개신교 내부의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가톨릭도 마찬가지다. 마리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가톨릭 내부에서 마리아를 균형 있게 전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 마리아를 숭배하도록 가르친 적은 없다. 가톨릭의 공식 문헌에도 이와 관련된 문구는 한 줄도 없다. 특히 마리아와 관련해서는 개신교가 공정하게 가르쳤으면 한다. 지난 해 9월 개신교 목회자를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이 자리에서 ‘목사님들이 성도 앞에서 하는 이야기를 가톨릭 성도 앞에서도 동일하게 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는 이야기만큼만 해달라’고 당부한 적이 있었다. 또 가톨릭교회 안에 마리아를 과장하는 그룹에 대해서도 그러지 말 것을 주문했다. 마리아에 대한 과장은 개신교 성도들이 마리아에게 배울 수 있는 아름다운 가르침을 방해하기 때문에 가톨릭 스스로 중단해야 한다.”   


[2015.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