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밀양>
영화 '밀양'의 주인공 신애는 유괴범에게 아들을 잃은 뒤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다가 기독교 신앙의 길로 들어섭니다. 신앙을 통해 치유를 경험한 신애는 자신의 아들을 유괴해 살해한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마음 먹고 교도소로 찾아갑니다. 그러나 신애는 너무나도 뜻밖의 상황과 맞딱뜨립니다.
자신이 유괴해 살해한 아이의 엄마가 왔음에도 그 살인범은 너무나 당당합니다. 뉘우치는 기색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습니다. 그는 신애 앞에서 자신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 평안 가운데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유괴범의 모습을 본 신애는 그만 넋이 나가고 맙니다.
영화 '밀양'의 원작은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입니다. 원작소설의 모티브는 1980년 광주 민중항쟁과 신군부의 집권이었습니다. 원작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날 이 나라의 아픈 과거, 그리고 교회의 어두운 역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1980년 전두환을 필두로하는 신군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서거로 인해 생긴 리더십 공백을 틈타 권력을 집어 삼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폭거에 항거하는, 동시에 민주주의를 갈급해했던 이 나라 민중들의 열망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1980년 광주의 비극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교회는 실로 놀라운 일을 행했습니다. 국가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고 새로이 권좌에 오른 대통령을 위해 은혜를 구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교회는 사실상 새로이 등장한 권력자가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저지른 잘못에 대해 면죄부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들의 손에 가장을, 형제를, 친구를 잃었던 이들의 아픔은 외면한 채....
이후 기독교는 음으로 양으로 정권의 비호를 받고 세를 불려 나갔습니다.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급속하게 팽창했던 시기가 바로 1980년대였다는 사실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소설 '벌레 이야기'는 교회가 부도덕한 권력과 손을 잡아 세확장에 나선 것은 결국 부도덕한 권력으로 인해 상처 입은 이 나라 백성들을 두 번 죽이는 행위였음을 우회적으로 꼬집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런 시대현실 보다는 신애의 내적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영화와 소설 모두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용서'의 참의미를 다루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영화와 소설 공히 '용서'가 잘못 적용되었을 때, 용서가 복음은 커녕 오히려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용서'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남겨준 값진 선물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평소 가까이 지내는 이들에게 귀한 선물을 받게 되면 그 선물을 소중히 여깁니다. 하물며 하느님께서 그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선물을 주었다면 당연 이 땅의 기독교인들은 용서를 귀하게 여겨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땅의 많은 교회와 성도들은 용서를 너무 무가치하게 남발하고 있습니다. 신성모독이 다른데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의 복음을 가볍게 여기는 행위가 신성모독이고 이 땅의 교회는 신성모독을 상습적으로 저지르고 있습니다.
용서에 앞서 죄상이 드러나야
우리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 마태복음 18:21~22
그 가르침을 따라 이 땅의 교회는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감싸줄 것을 권면합니다. 부족할 수 밖엔 없고, 더욱 근본적으로 죄를 숙명적으로 안고 태어나는 인간 존재가 서로의 허물을 감싸주고 덮어주는 모습은 참 아름답기만 합니다. 또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셨으니까요. 하지만, 용서하기에 앞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죄의 드러남입니다. 이 땅의 많은 교회와 신도는 바로 이 대목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가 공수표가 되어 버렸습니다.
앞서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에게 남겨준 값진 선물이라고 했었습니다. 값진 선물은 길거리 커피자판기에서 인스턴트 커피 나오듯 뽑아져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메달려 모진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짊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죄악이 드러났나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비단 그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지 2천년 하고도 11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신약성서에 기록된 인간의 죄악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 죄악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몸소 짊어지셔야 했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본을 보이시면서까지 용서의 복음을 가르치셨건만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은 너무나도 쉽게 용서를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목회자, 그것도 대형교회 목회자가 죄악을 저질렀을 땐 용서의 복음이 이 땅의 방방곡곡에서 넘쳐 납니다. 용서의 복음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도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티끌만도 못한 죄인입니다.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용서하라고 제자들에게 권면하셨습니다. 당연히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용서에 앞서 죄를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최근 물의를 일으킨 목회자들의 경우 그들의 잘못은 드러나지 않은 채, 그저 덮어놓고 용서의 복음만 설파되었습니다. 이들의 죄악상은 교회 안에서보다 언론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이때 교회가 보인 반응은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목회자의 잘못을 드러낸 언론을 향해 독설을 내뿜었고 심지어는 신도들을 부추겨 집단행동도 불사했습니다. 신도들 역시 밝혀진 것은 없다, '우리' 목사님이 좋은 일 많이했는데, 능력 있는 설교로 많은 이들을 예수께로 인도했는데 왜 사소한(?) 잘못을 들추어 목사님을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리고선 덮어놓고 용서만을 되뇌었습니다. 최근엔 젊은이들마저 목회자의 잘못을 공론화하는 것이 '덕'이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광경까지 목격했습니다. 정말이지 허탈감마저 드는 광경이었습니다.
단언컨데, 죄의 드러냄 없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라 은폐입니다. 은폐된 죄악은 언제고 다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것도 더 흉한 몰골을 하고서.
지금 이 땅의 많은 교회와 목회자의 죄악들은 사실 많이 덮어져 왔습니다. '덕'이 안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를 찬찬히 들여다 보았으면 합니다. '덕'이 안된다고 성서 속 인물들의 죄악이 덮어졌나요? 목회자가 죄악을 저질렀을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인물이 바로 다윗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 다윗은 심복인 우리야의 아내 바세바를 범했고 그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 우리야를 사지로 내몰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다윗의 죄상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구약성서에 세세하게 기록 되었기에 알 수 있지 않았나요? 성서의 기자들이 '덕'이 안된다고 다윗의 치부를 덮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성서를 조금 주의깊게만 들여다 보아도 지금 교회의 모습은 성서와는 한참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한 분이셔서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분임은 유초등부 학생들도 잘 아는 사실인데 나이 좀 먹고 고등교육도 받았고, 사회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사람들조차 '덕' 운운하며 교회나 목회자의 치부를 외면하고 은폐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현실은 서글프기까지 합니다.
용서는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그 선물을 준 이를 무시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이렇게 귀한 선물임에도 교회는, 목사는, 신도들은 너무나 쉽게 용서를 이야기합니다. 지금 교회가 설파하는 용서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 마저 무시하는, 말 그대로 신성모독입니다. 예배 시간에 온갖 거룩한 표정은 다 지으면서 예배 드리고 사람들이랑 교제 나눌 때 성서에 기록된 거룩한 글귀들을 입에 올려야 올바른 기독교인인가요?
제발 교회와 성도가 이런 착각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 간절합니다. 복음의 능력은 말에 있지 않고 행함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지금 보여지는 모습들은 달달한 말잔치만이 교회와 성도가 마땅히 행해야 할 본연의 태도 같아 보입니다. 특히 용서에 관한 한,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은 행함, 즉 죄의 드러남 보다는 은폐에 더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건데, 하느님은 쉽게 용서를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뿌리게 했을 정도로 용서의 대가는 엄혹했습니다.
이제 용서의 복음을 욕보이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전 가면 갈수록 하느님이 두려워집니다. 복음을, 하느님의 권능을 잘못 받아들이고도 고치려 하지 않는 이 백성의 간악함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실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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