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스키 감독 “북한 주민의 삶, 폭력으로 바꿔선 안돼”
리뷰] 평양 속살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태양 아래>
▲<태양 아래>를 연출한 비탈리 만스키 감독.ⓒ luke wycliff
"먼저 이 영화를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곳을 방문하게 된 것을 굉장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남한과 북한, 한 민족 간의 재앙에 대해 그리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굉장히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민족에 대한 얘기를 보여주는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고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 국민의 반응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태양 아래>를 연출한 비탈리 만스키 감독이 지난 달 26일 한국 기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밝힌 소감이다.
<태양 아래>는 북한 평양에 사는 여덟 살 소녀 진미의 일상을 그린 다큐멘터리다. 만스키 감독은 영화를 위해 진미, 그리고 진미 가족과 1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감독의 의심 : 이 모든 광경이 눈속임 아닐까?
▲다큐멘터리 <태양 아래>는 여덟살 소녀 진미와 가족을 통해 북한 체제의 실상을 폭로한다.ⓒ THE픽쳐스
영화는 그동안 CNN·BBC 같은 유력 외신이나 조선중앙TV가 내보낸 화면을 통해 단편적으로만 알려진 평양 시내와 주민들의 생활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영화에 담겨진 평양의 일상은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다. 평양 시내는 잘 정돈됐고, 시민들의 생활수준은 그다지 열악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영화 중간 종이 조각을 얻고자 쓰레기통을 뒤지는 남루한 몰골의 소년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지점에서 만스키 감독은 날선 질문을 던진다. '혹시 이 모든 광경이 눈속임이 아닌가?' - 만스키 감독은 먼저 북한 당국이 진미 가족의 일상을 조작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진미 아빠의 진짜 직업은 기자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아버지의 직업을 봉제 공장 직원이라고 속인다. 북한 당국은 진미의 가족들이 식탁에 앉아 일상적으로 나누는 대화마저 개입한다. 이 정도는 그나마 점잖은 편이다. 평양 시민들은 어린 시절부터 김일성이 항일, 항미 투쟁에서 보여준 영웅적 활약을 반복적으로 학습하며 체제의 일부로 개조돼 나간다.
한편 영화는 평양의 삭막한 도시구조를 드러낸다. 시내 건물은 온통 회색빛에 배열은 획일적이다. 북한 노동당을 상징하는 조형물은 시민 위에 군림하는 듯한 모양새고,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동상은 끔찍할만큼 위압적이다. 도시가 시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시민이 도시를 위해 존재한다는 인상을 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어떻게 찍었을까
▲<태양 아래>의 무대인 평양시내는 삭막하기 그지 없다. 김일성-김정일 부자 동상은 주민들을 초라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THE픽쳐스
북한을 지탱하게 만드는 거의 유일한 힘은 자존심이다. 이런 이유로 북한은 외부에서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면 신경질적인 대응으로 일관해왔다. 북한 당국이 외국 언론인이나 선교사를 투옥하는 일도 흔하다. 지난 6일 북한 당국이 '불경스런' 보도를 했다며 영국 BBC의 루퍼트 윙필드 헤이스 기자를 구금한 뒤 추방한 일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이라면 북한 당국이 만스키 감독을 면밀히 감시했으리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 만스키 감독은 '이토록 통제된 상황에서 작업하기는 처음'이라면서 불만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감독이 북한의 심기를 건드릴 법한 장면은 어떻게 담을 수 있었을까?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일단 먼저 제가 찍고 싶었던 모습은 하나도 찍지 못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찍었던 모든 영상은 북한 당국의 통제 하에 촬영됐기 때문입니다. (중략) 북한 당국에서는 촬영이 시작된 첫날 저희에게 이야기했는데요, 저희는 매일 매일 촬영한 촬영본을 검열과 통제를 위해 제출했어야 했고, 거기에서 당국이 허락하지 않는 분량은 다 폐기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촬영이 끝난 직후에 비밀리에 북한 당국이 알 수 없게 모든 분량의 카피본을 만들었고, 검열을 위해서 제출한 제출본에는 사실상 약 70% 정도의 촬영본 분량이 삭제된 상태로 제출됐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그 사실에 대해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눈치를 챘다면 저희가 그것을 가져가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만스키 감독이 북한 당국의 감시망을 따돌린 대목은 독일 언론인 유르겐 힌츠페터가 5.18 당시 광주의 참상을 담은 필름을 쿠기 상자에 넣어 빼돌린 광경을 방불케 한다. 만스키 감독이 위험을 무릅쓴 이유는 힌츠페터와 동일하다. 바로 진실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지적했듯 만스키 감독은 촬영 내내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과연 진짜 북한의 속살인지 의문을 던진다. 북한 당국의 개입과 통제는 감독의 의구심을 더욱 증폭시키게 할 뿐이다. 결국 감독은 답을 찾지 못했다. 북한 주민에게 연민을 표시하는 일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왜곡의 위험성
▲<태양 아래>를 연출한 비탈리 만스키 감독은 북한 주민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접근을 통한 변화를 강조했다.ⓒ luke wycliff
그런데 이 영화는 진영논리에 따라 왜곡될 위험성이 높다. 조작이 만연하는 북한 체제를 여과 없이 보여주다보니 특히 보수반공 진영에겐 체제 우위를 홍보할 더할 나위없는 소재로 활용될 소지가 크다. 지난 4일 국방부는 특별상영회를 개최했고, 어린이날인 5일엔 박근혜 대통령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 박 대통령은 영화 관람 뒤 "오늘 이 영화를 보고 어린이날을 맞아 꿈을 잃고 어렵게 살아가는 북한 어린이들을 우리가 보듬고 보살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은 자연스럽게 김정은 체제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러나 정작 만스키 감독은 체제 변화가 가진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의 말이다.
"북한 주민의 삶을 전쟁과 같은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바꿔선 안됩니다. 왜냐하면, 북한 사람들은 세계 모든 나라와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문제를 폭력적으로 해결하려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북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과정은 굉장히 오랜 기간 참을성을 갖고 수십 년에 걸쳐서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독의 말 중에 "북한 사람들은 세계 모든 나라와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문제를 폭력적으로 해결하려 한다고 믿고 있다"는 대목에 주목하자.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북한 주민들은 미국이나 제3국이 전쟁으로 자신들의 삶을 바꾸려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라크 사례를 살펴보면 만스키 감독의 통찰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미국은 후세인만 몰아내면 이라크는 쉽게 장악할 수 있으리라 낙관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이라크는 혼돈을 거듭했고, 이라크 국민의 삶도 날로 피폐해졌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미국이 북한 체제 전복을 시도한다면 비슷한 사태가 벌어질 여지는 높다.
사실 조심스럽게 접근해 북한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발상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집권 당시 햇볕정책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2008년 이후 보수 정권이 들어서고, 여기에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얽히면서 '접근을 통한 변화'는 폐기되다시피 한 상황이다. 그래서 북한 주민을 연민 어린 시각으로 바라보면서도, 접근을 통한 변화를 강조하는 만스키 감독의 지적은 더욱 큰 울림을 남긴다.
덧붙이는 글
관객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더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북한 체제의 실체를 진지하게 고민해주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그러나 이 같은 바람이 무색하게 8일 기준 전국 53개 스크린에 상영회수는 고작 67회에 불과하다. 만스키 감독은 "상업성 때문에 영화를 외면하는 것 아니냐"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기도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담아온 감독에게 부끄럽기만 하다.
'Cine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0) | 2016.06.09 |
---|---|
의심을 품은 당신, 만져봐라 이 뼈와 살을 (0) | 2016.06.08 |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옳은 편에 서야하지 않겠는가? (0) | 2016.05.12 |
조선업 구조조정의 현 주소, 이 남자들의 스트립쇼 보면 이해된다 (0) | 2016.05.10 |
원작 훼손한 리메이크, 보기 고통스럽다 (0) | 2016.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