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사투
- 솔로몬 노섭의 자전적 이야기 <노예 12년>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 그러나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존엄을 무참하게 유린하기도 한다. 솔로몬 노섭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영화화한 스티브 맥퀸 감독의 <노예 12년>은 한 인간이 피부색이 다른 인간에게 제도적으로 폭력을 가한 사실의 기록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19세기 미국에서 흑인 노예 노동이 얼마나 야수적으로 이뤄졌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이 영화를 이해하려면 당시로 돌아가 보아야 한다. 남북전쟁 발발 직전까지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등 미국 남부주들에선 목화생산이 급속히 늘어났다. 그런데 목화를 재배하고 목화솜을 따기 위해선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런 노동수요를 채운 것이 바로 아프리카에서 수입된 흑인 노예였다. 1790년부터 1808년까지 수입된 노예만 8만 명에 이른다. 그러다가 1808년 노예 수입이 중단됐고, 이러자 북부 자유주에서 자유인 신분으로 살아가는 흑인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넘기는 일이 횡행했다. <노예 12년>의 솔로몬 노섭은 바로 이런 경우다.
* <노예 12년>
주인공 솔로몬은 백인 인신매매범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려나가는 기구한 운명을 맞이한다. 사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아미스타드>, 퀜틴 타란티노의 <장고> 등 노예제의 부당성을 고발하는 영화는 기존에도 있었다. 이 작품 <노예 12>년도 전작들과 연장선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흑인 노예들의 참상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들어간다. 솔로몬은 온갖 차별과 학대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외로이 사투를 벌인다. 하루는 백인 중간관리인이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 그를 괴롭히려 하자 그는 이 관리인과 맞붙어 싸웠을 정도였다. 카메라는 자유인 솔로몬이었다가 노예 플랫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기막힌 인생역전을 묵묵히 응시한다.
첫 주인인 윌리엄 포드(베네딕트 컴버배치)는 그의 가치를 알아보고 파격적인 대우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포드 역시 백인일 뿐이다. 노예제가 횡행하던 남부에서 플랫에게 자유를 주려 했다간 오히려 자신이 화를 당할 수 있음을 잘 안다. 게다가 포드는 플랫을 담보로 빚을 졌고, 그 빚을 감당하기 어려워 다른 백인 농장주에게 넘기고야 만다.
두 번째 주인인 에드윈 앱스는 그야말로 악질이다. 노예들이 하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가차 없이 채찍질을 가한다. 그러면서도 여자 노예 팻시를 무척 아낀다. 그렇지만 인격적인 대우와는 거리가 멀다. 앱스는 팻시를 그저 자신의 욕정을 채우는 노리개로 여길 뿐이다. 앱스 역을 맡은 마이클 파스밴더의 연기는 신들린 듯하다. 그는 그동안 <프로메테우스>, <카운슬러> 등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에 잇달아 출연하며 연기력을 과시했지만 감독의 연출력 부재로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는 이런 아쉬움을 날리기라도 하듯 악덕 농장주 앱스를 연기하며 절정의 연기력을 뿜어낸다.
타이틀 롤 솔로몬 역의 치웨텔 웨지오포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묵직한 연기로 자유인에서 노예로 전락해버린 기막힌 인생을 겪으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으려는 플랫의 내면을 잘 표현해 낸다. 팻시 역의 루피타 뇽의 연기도 놀라움 그 자체다.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의미
이 작품은 지난 3월3일 열린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사실 이 작품은 백인의 시선으로 보기에 불편하기 짝이 없다. 작품이 그리는 백인은 야비하고 천박하다. 노예를 팔아 돈을 버는 노예상인과 이들을 부리는 주인은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약자의 위치에 있는 백인마저 흑인을 능멸한다.
솔로몬은 앱스의 농장에서 목화를 따는 일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백인도 이 일을 하게 된다. 이 백인은 현장에서 노예들의 작업을 관리 감독하는 중간관리자였다가 빚으로 인해 노예와 같은 신세로 전락했다. 솔로몬은 이 자에게 자신이 숨겨놓은 돈을 건네주며 자신의 처지를 편지로 쓸테니 이 편지를 우체국에 보내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이 백인이 자신보다 자유롭기에 솔로몬은 그를 탈출구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이 자는 솔로몬의 부탁을 들어주겠노라고 약속한다. 그러나 이 자는 돈만 가로 챙기고 솔로몬이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고 주인인 앱스에게 일러바친다. 앱스는 솔로몬을 강력히 추궁하지만 솔로몬은 기지를 발휘해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다. 이 영화는 이 장면 말고도 여러모로 백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만한 대목이 곳곳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보수적이고 특히 백인 중산층 취향을 강하게 드러내왔던 아카데미는 이 작품에 작품상을 안겨줬다.
<노예 12년>의 아카데미상 작품상 수상은 미국의 현 정치지형을 반영한다. 현재 미국의 집권여당은 민주당으로 흑인계층은 민주당의 전통적인 지지기반이었다. 또한 미국 대통령은 흑인인 오바마다. 이런 배경이 아니었다면 이 작품은 아카데미의 벽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아카데미는 비슷한 소재를 다룬 스필버그의 <칼라 퍼플>이나 <아미스타드>를 싸늘히 외면했다.
노예로 만족할 것인가?
플랫은 캐나다인 목수 베스의 도움으로 노예생활을 끝내고 다시금 솔로몬으로 돌아온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솔로몬의 사례는 극히 드물다는 자막이 흐른다. 그가 인생을 되찾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때문이었다.
백인들은 오랫 동안 흑인들을 열등 인종 취급했다. 퀜틴 타란티노의 <장고>에서 백인 농장주 캘빈 캔디는 비아냥 가득한 어조로 "흑인은 골상학적으로 굴종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타고 났다"며 흑인을 극도로 비하한다. 이런 백인들이 가장 두려워한 존재는 바로 솔로몬같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 했던 이들이었다.
영화에서 백인들은 솔로몬을 잡아들이자 모질게 매질을 한다. 이렇게 가혹할 정도로 매질을 가한 이유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짓밟기 위해서다. 솔로몬은 억울해 하면서도 그 모든 질곡을 견뎌냈고, 호시탐탐 자유를 찾기 위해 기회를 노렸으며, 마침내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오자 놓치지 않고 자유를 되찾았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법 위에 군림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실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고급 승용차를 탄 운전자들이 중소형 승용차 운전자들에 비해 교통법규를 더 많이, 더 자주 위반했다고 한다. 그러나 힘없는 이들은 이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저자세를 취하기 일쑤다. 혹시나 보복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혹은 이들에게 잘 보여서 반대급부를 취하기 위해서다. 이런 태도는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짓밟는 일이다. 권력자들은 스스로 존엄을 버린 사람들의 존엄을 지켜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을 비웃으면서 그나마 남은 존엄마저 짓밟아 버릴 뿐이다.
비록 작고 약하더라도 자신의 존엄을 지킬 때 저들은 두려움에 떤다. 스스로 노예로 살 것인가? 아니면 자유를 쟁취할 것인가?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12년 동안 투쟁했던 솔로몬이 던져주는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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