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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얄타회담 막전막후, 왜 지금 알아야 하냐면 얄타회담 막전막후, 왜 지금 알아야 하냐면[리뷰] 마이클 돕스의 '1945'▲ 마이클 돕스, ⓒ 모던 아카이브 1945년 2월은 연합국의 승리가 눈에 들어오던 시점이었다. 이 무렵 미국의 F.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옛 소련의 스탈린은 크림반도 남부의 얄타에서 전후 국제질서를 논의했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이 세 정상의 회동을 역사는 '얄타회담'이라고 이름 붙였다. 얄타회담의 역사적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회담의 결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가 형성돼 나갔고, 더욱 중요하게는 미국과 옛 소련을 축으로 한 대립구도, 즉 '냉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멀리 크림반도에서 있었던 회담 결과는 한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치기에 이른다. 지금 한반도 분단과 남북 대치는 얄타회담의 결과물이다... 더보기
대한민국에서 부활한 스탈린의 망령 권력에 의한 보복은 잔혹하기 짝이 없다. 스탈린(1879~1953)은 누구에게나 존경 받지는 못했지만 누구나 두려워했던 인물이었다. 반면 트로츠키(1879~1940)는 학식과 언변이 뛰어났다. 그런 트로츠키에게 그루지야 출신의 촌뜨기 무식쟁이는 눈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이에 스탈린은 앙심을 품고 트로츠키에게 날을 세웠다. 스탈린의 보복은 비단 그에게만 그치지 않았다. 트로츠키에겐 각각 딸과 아들이 두 명씩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두 명의 사위와 네 명의 외손자들은 시베리아 추방뒤 실종됐다. * 스탈린(1879~1953) 트로츠키는 스탈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는 멕시코 외무장관에게 이 같은 편지를 썼다. "스탈린은 제 아내와 하나 남은 손자 녀석만 빼고 내 가족을 전부 몰살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