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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예수의 성전항쟁, 왜 교회에서 듣기 힘들까?

예수의 성전항쟁, 왜 교회에서 듣기 힘들까?

[리뷰] 해방신학자가 발굴한 '역사 예수' <슬픈 예수>


신약성서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는 성품이 강직하고, 감정표현이 솔직한 분이다. 이 같은 성품을 지닌 예수께서 만약 지금 이 나라에 다시 오시면 어떻게 반응하실까? 모르긴 몰라도 ‘빛’과 ‘소금’의 구실을 못하고 돈과 권력만 좇는 교회를 보시며 슬피 우셨을 것이다.


여기 더욱 슬픈 사실이 있다.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아우르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예수는 사실상 배제되다시피했다. 로마 제국이 공인하면서 그리스도교는 체제 유지 수단으로 전락했고, 이 과정에서 예수의 복된 가르침은 설 자리를 잃었다. 예수께선 제도권 종교로 전락한 그리스도교를 보며 슬퍼하셨으리라. 그래서 예수는 슬프다.

평신도 신학자이자 가톨릭 인터넷 신문 <가톨릭 프레스> 편집장인 김근수씨는 예수의 슬픔을 들여다 본다. 그래서 제목도 <슬픈 예수>다. 이 책을 한 마디로 규정하면 <마르코 복음> 해설서다. 사족을 붙이면 사복음서 가운데 <마르코 복음>이 가장 먼저 씌여졌다. 이어 <마태오 복음>과 <루가 복음>이 나왔고, <요한 복음>은 가장 나중에 완성됐다. 


저자는 성서신학, 그리고 해방신학의 방법론으로 <마르코 복음>을 풀어낸다. 복음서 말씀과 이를 둘러싼 사회, 역사적 맥락을 분석하는 대목에서는 성서신학이, 그리고 예수의 행적이 담고 있는 신앙적 의미를 전하는 지점에서는 해방신학의 시선이 번득인다.


그러나 단순히 저자가 지적 유희를 위해 <마르코 복음>을 풀어낸 건 아님을 유의하자. 무엇보다 이 책은 예수, 특히 ‘역사 예수’를 발굴하기 위한 시도다. 역사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선 <마르코 복음>이 쓰여진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복음서는 훌륭한 전시 문학


<마르코 복음>은 처음부터 예수가 메시아임을 드러내지 않는다. 예수의 공적 활동(공생애)을 기록하면서 그가 메시아임을 슬쩍 암시할 뿐이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묵시록적 예언을 곁들이다가, 예루살렘 입성과 십자가 고난 장면을 보도하면서 메시아임을 드러낸다. 이런 구성과 편집은 복음서가 기록된 상황에서 비롯됐다. 


“예수 역사의 핵심 부분을 최초로 기록한 책이 바로 <마르코>다. <마르코>는 일종의 전시(戰時) 문학작품이다. 예수가 처형된 지 40년 밖에 지나지 않은 70년에 벌어진 유대전쟁의 와중에서 기록된 책이니 말이다. 로마 군대에 의한 조국 이스라엘의 멸망, 1세대 제자들의 순교,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와 죽음, 유대교와의 갈등과 분열을 듣고 지켜보던 마르코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그는 예수의 역사를 보존하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 <마르코>를 쓰게 되었다.” 


- 본문 6쪽 


<마르코 복음> 기자가 예수의 기록을 써내려간 시절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공적 활동을 벌였던 시절이나 흉흉하기는 마찬가지였나 보다. 복음서가 쓰여진 시기에 이스라엘의 명운이 위태로웠다면, 예수가 활동했던 시기의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압제와 종교권력자의 착취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특히 <마르코 복음>엔 예수가 병자를 고친 활동과 함께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이 종종 눈에 띈다. 예수가 구마의식을 집례하는 사제였을까? 그렇지는 않다. 예수의 ‘귀신 쫓기’ 활동은 흉흉한 사회상을 반영하는 단면이다. 


“예수가 귀신을 쫓는 분으로 믿어졌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인할 수는 없다. 귀신 쫓는 사람들의 활약은 가난한 사람들에겐 낯설지 않았다. 오늘날 구마(驅魔), 악령 퇴치라는 주제를 다루기란 그리 쉽지 않다. 예수에 대한 책에서 대부분 외면되는 주제이지만, 복음에 그 자료가 많아서 그저 모른 체 할 수는 없다. 군사정권 시대 한국인의 정신건강은 얼마나 비참했을까. 로마 식민지로 살아가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정신건강은 또 얼마나 비참했을까. 백성의 비참한 현실을 예수는 지나치지 않고 눈여겨 본다.” 


- 본문 35~36쪽.


예수는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물 흘리는 자, 억눌린 자와 함께 했다. 단지 한두 번의 구호 활동에 그치지 않고 그들과 먹고 마시며 어울렸다. 예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르코>엔 나타나지 않지만, <마태오>와 <루가> 복음서에서 예수는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라고 선포했다. <루가>와 달리 <마태오>에서는 ‘가난한 사람’ 앞에 ‘심령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지만, ‘가난으로 인해 마음이 어렵다’는 뜻이기에 같은 말이다.


반면 권력자들을 향해선 날을 세웠다. 예수의 공생애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권력은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로 양분돼 있었다. 사두가이파는 로마 제국과 결탁해 특혜를 누렸다. 바리사이는 엄격한 계율을 지키며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기 어려운 사회적 약자 계층에 대해선 거리낌 없이 죄인으로 규정했다. 예수는 정치적으로는 사두가이와 종교적으로는 바리사이와 대립했다. 특히 사두가이는 예수와 예수 운동을 불온한 것으로 취급했다.


교회 개혁 무서워 무시당한 ‘성전항쟁’ 보도


예수가 당대 권력자들의 눈밖에 난 사건이 바로 11장 15절 이하에 기록된 ‘성전항쟁’ 사건이다. 성전항쟁에서 보여준 예수의 행동은 과격 그 자체였다. “성전에서 사고 파는 사람을 쫓아” 내는가 하면 “환전상들의 책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엎었다.” 현대적인 시각으로 대형교회나 주요 성당에서 성도들 상대로 영업하던 식당, 카페에 들어가 난동을 피웠다고 이해하면 쉽다. 저자는 예수의 성전항쟁을 이렇게 풀이한다. 


“예수 죽음의 원인은 성전 항쟁과 가장 깊이 연결되어 있다. 성전 경찰이 개입할 정도로 대단한 난동은 아니었지만 최고 권력층들의 미움을 사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다. 하루 두 차례씩 로마 황제를 위해 제사 지내던 예루살렘 성전을 예수가 난동을 부리며 모욕했다는 소식을 로마 총독 빌라도가 듣지 못했을 리 없다. 그 분노를 상상해 보라. 당시 최고 권력층에서 예수를 제거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 본문 216쪽


사실 성전항쟁 사건은 상징성이 강하면서도, 동시에 제도권 교회에서 가장 많이 외면되는 대목이다. 왜일까? 


“예수는 정치행위를 한 적이 없다는 설교를 우리는 지겹게 들어왔다. 자기 시조가 죽은 원인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설교가 세상에 어디 있나. 성전 항쟁 이야기가 신도들의 비판의식과 개혁 정신을 촉구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신도들이 종교 내부의 개혁을 촉구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성직자 대부분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성서를 잘 아는 신자들이다.” 


- 본문 217쪽


거창하게 그리스도교 전통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국 교회에서 예수는 그저 ‘복의 근원’, ‘축복의 통로’ 정도로만 이해돼왔다. 종종 여성 차별 및 성직 배제, 타종교나 성소수자 등 ‘타자’에 대한 혐오, 보수 정치세력과의 결탁 등 어느 면에선 예수의 가르침을 배반하는 일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되기도 했다. 특히 보수 개신교계는 가장 반예수적인 활동을 예수의 이름과 엮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이런 비판에 개신교계는 억울해할지 모른다. 비영리독립기구인 월드디아스포라포럼(WDF)이 지난 5월부터 3개월 동안 전국의 3351개 교회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91.4%가 지역사회 섬김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통계수치만 따져보면 개신교가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에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는 가난한 사람이 주인되는 나라를 이 땅에 이루고자 했다. 과연 교회의 사회섬김 활동의 주인은 누구인가? 목회자인가? 기부금을 많이 낸 부유한 신도인가? 아니면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가난한 사람들인가? 


이 대목에서 해방신학을 조명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해방신학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변방에 놓였던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냈다. ‘구원자 하느님’의 땅 엘살바도르에서 해방신학을 공부한 저자는 해방신학을 이렇게 평가한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 편들기,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보는 신학이 해방신학의 핵심내용이다. 해방신학은 신학의 한 분야가 아니라 신학의 한 방법론이다. 유행 따라 사라지는 시대적 흐름이 아니라 타당한 신학적 방법은 해방신학은 이미 신학계에 정착하여 신학의 모든 분야에 활발하게 적용되고 있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을 도움의 대상으로 보는 순진한 시각에서 벗어나 그들을 세상 변혁의 주체로 생각한다.” 


- 본문 302쪽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예수께서 지금 이 땅에 오시면 기뻐하실까? 그렇지 않다. 제주 강정(해군기지), 밀양(송전탑), 광화문과 진도 팽목항(세월호 참사), 국가인권위 전광판(기아차 비정규직) 등 지금 이 땅에 가난하고, 억울하고, 억눌린 자들이 넘쳐나서다. 그리스도교는 어떨까?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데 앞장서고 있는가?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런 광경을 보고 예수는 슬피 우실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여전히 슬픈 예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