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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이 되어

믿음에 대한 짧은 생각

믿음에 대한 짧은 생각

비정상의 일상화, ‘믿음’부터 다시 세워야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느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은 하느님, 그리고 그의 외아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점은 믿음이다. 사도 바울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마음으로 믿는 믿음이 구원으로 이어진다고 적는다. 


여기서 믿음이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일반적으로 믿음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먼저 ‘신뢰한다’, 즉 나 외에 다른 사람이 내게 유익을 준다고 보고 그래서 ‘믿고 맡긴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초월적 존재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아우르는 모든 종교인들은 믿음의 의미를 두 번째에 둔다. 기독교 신앙으로 논의를 한정해 보자면, 하느님은 우주만물의 창조자 되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시기에 일정 수준 초월적 속성을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늘 인간과 함께 계시고 인간 탄생 이전에 선한 계획을 마련해 놓고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는 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신뢰의 의미도 있다. 


우리는 늘 고백한다. 당신에게 우리의 삶을 맡긴다고. 우리가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하느님을 향한 신뢰는 돈독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에서 자주 언급되는 ‘믿음’은 초월적인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신념이라기보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의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믿음 강요하는 국정원, 교회 발언에 발끈하는 한국 교회 

최근 한국 사회는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의 도·감청 의혹으로 홍역을 치르는 중이다. 국정원의 도·감청 의혹은 국가정보기관이 국민들의 사생활 염탐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띤다. 실제 국정원이 도·감청을 통해 몇몇 대상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감시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 와중에 국정원 직원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여기서 묘한 현상이 발견된다. 국정원은 덮어놓고 자신들을 믿어 달라고 종용하다시피 한다. 그간 불거진 의혹을 말끔히 해소시켜줄 증거자료를 내놓은 건 아님에도 말이다. 이런 광경을 보다 못한 새정치민주연합 김광진 의원은 뼈 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아무런 근거 없고 믿어 달라. 실시간 도청도 안 된다. 믿어 달라. 지금 저안이 거의 교회에요, 교회”


정보기관은 국민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국정원은 믿음의 두 번째 정의, 즉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국민에게 강요하다시피 한다. 이런 현상은 비단 국정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2008년 기독교 장로 집권 이후부터 대통령과 정부·여당이 하는 일에 신성성이 부여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정부 기관이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 했나 따져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에게서 온갖 부정과 비리 의혹이 불거져 나왔다. 이런 와중에 국민들의 삶은 팍팍해져만 갔고, 특히 사회적 약자들은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지경으로 내몰렸다. 그런 자들이 스스로를 초자연적인 존재로 포지셔닝 해놓고 믿음을 강요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이 와중에 보수교단 연합체인 한국교회연합(이하 한교연)과 주로 보수교단의 입장을 대변해온 한국교회언론회(이하 언론회)는 김광진 의원의 발언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한교연은 김 의원의 발언이 “한국교회 1천만 성도 뿐 아니라 전 세계 기독교인들을 폄훼하고 모독한 것”이라고 평했다. 언론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김 의원의 눈에는 한국교회 1,000만 성도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도 없는 맹신자로 보이는가?”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김 의원의 발언은 얼핏 교회를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곳으로 비쳐지게 한다. 그러나 발언의 진위를 떠나 대다수 교회가 맹목적 믿음을 공공연히 강요하는 건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인격적 하느님에 대한 신뢰 보다는 초자연적 하느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건전한 신앙인 양 설파해 왔다는 의미다. 또 보수 정부에 신적 권위를 부여한 데 앞장선 곳도 교회, 특히 보수 교단 산하 교회였다. 


이 기회에 분명히 해두자.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그분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선한 계획을 세워 놓고 선한 방향으로 인도해 주는 분임을 깨달아 알며, 그래서 그분에게 자신의 삶을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정부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감시대상이다. 즉, 주어진 권력을 남용해 사리사욕을 탐하고 국민들의 삶에 위해를 끼치는 건 아닌지 국민들로부터 감시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역으로 정부는 궁극적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이게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최근 우리 사회와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믿음이 마구 남용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선 ‘믿음’이란 낱말의 의미부터 바로 세우자. 그것이 비정상이 일상화 되고 있는 우리 사회를 바로 세울 작지만 의미 있는 움직임일 것이다.